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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다음이란 건 없어"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정미경 1주기 유고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입력 : 2018. 02.02. 00:00:00
마지막 단편 표제작으로
정지아·정이현 추모산문
우리에겐 너무 짧은 시간


작년 1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모두를 안타깝게 한 소설가 정미경의 유고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가 고인의 1주기에 맞춰 출간됐다. 소설집으로 묶이지 않았던 근작소설 5편과 고인의 동료 소설가 정지아, 정이현 그리고 김병종 화백의 그리움을 담아 써내려간 추모산문 3편을 함께 묶었다. 표제작 '새벽까지 희미하게'는 2016년 여름에 발표했던 단편소설로 작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소설이다.

인도나 동남아시아 풍의 화려하고도 조악한 꽃무늬 여름 원피스들이 놀랍도록 싼 가격표를 붙이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곧 지나가버릴 계절의 옷들. 늙거나 젊은 여자들이 리어카 앞에 붙어 옷을 고르고 있었다. 자신의 생에서 내년 여름이라는 시간이 100% 있을 거라는 그 확신이 놀라워 그녀들을 한동안 바라보다 파란색과 꽃분홍색 옷이 걸린 옷걸이를 빼 들고는 제 몸에 하나씩 대보았다.

이번 유고소설집의 문을 여는 작품 '못'은 그간 읽어왔던 작가의 소설과는 조금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금희'와 '공' 두 남녀의 시선을 분리해서 서술해나가는 이 작품은 자신의 욕망에 전력으로 매달림으로써 불안을 유예하는 남자 공과 미리 내려놓음으로써 불안의 싹수를 자르는 여자 금희의 이야기다. 결국 공이 잃었던 제자리를 다시 찾음으로써 금희의 곁을 떠나고, 공과 함께 기르던 고양이를 금희가 병원에 버려두고 나오는 대목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다음. 다음이란 건 없어."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마'는 무자비한 삶의 속성을 껴안으면서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용기를 주는 소설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풀어놓은 작품이다. 양육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하러 낯선 도시에 온 여자 '윤'과 기계적인 일에 시달리는 남자 '장'이 함께한 하루 동안의 이야기는 삶을 향한 뜨거운 찬사로 읽힌다. 어쩌면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은 작가가 우리에게 남기고 싶었을 메시지였는지도 모른다.

한 작가가 우리 곁을 떠난다는 것은 이제 다시는 그의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우리에게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들을 천천히 곱씹어 읽어보자. 창비. 1만3000원. 김현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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