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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0주년 아픔을 넘어 미래로-7 / 제1부 4·3의 현소] (6)유해발굴 성과와 한계
집단학살 실체 만천하에 드러나… DNA 분석 지지부진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입력 : 2018. 04.03. 20:00:00

제주국제공항 유해발굴 설명회에서 4·3유족들이 발굴 현장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한라일보DB

약 3만 명에 이르는 제주4·3희생자 가운데 행방불명인은 진실 규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들은 국가가 자행한 불법 군사재판과 예비검속으로 학살돼 제주 곳곳에 암매장되거나, 수장됐다. 육지부 형무소로 끌려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이들도 상당수다.

대규모 집단 학살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2007년 8월 정뜨르 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유해발굴을 통해서다. 정뜨르 비행장은 행방불명인들이 가장 많이 학살암매장된 곳으로 꼽힌다. 그러나 서슬 퍼런 군사정권과 국가의 최고급 보안시설이라는 이유로 유해 발굴 등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오랜 세월 유족들은 사망일시와 장소, 시신수습 여부 등을 전혀 알지 못해 생일날 제사를 지내거나 시신도 없는 헛무덤을 만들어 부모 형제를 기다려 왔다.

물론 이에 앞서 1992년 구좌읍 다랑쉬굴에서 4·3 당시 희생된 유해 11구가 발견돼 충격을 을 준바 있다. 1994년에는 애월읍 발이오름에서 유해 1구가 발견됐다.

제주국제공항 발굴 유해를 운구하는 모습. 한라일보DB

이후 유해발굴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2006년부터다. 2010년까지 5년간 발굴을 통해 별도봉 일본군 갱도진지(8구), 화북천 인근 밭(3구), 선흘리 암매장지와 태흥리(각각 1구)에서 유해를 찾아냈다.

하지만 정뜨르 비행장 유해발굴은 그 수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불법 군사재판으로 집단 처형당한 실체가 거의 사건 발생 60년 만에 드러났다는 점에서 파장은 컸다. 2007년 8월 시작된 1단계 발굴에서는 유해 123구와 각종 유류품이, 2008년 9월 2단계 발굴을 통해서는 259구의 완전 유해와 1000점이 넘는 유류품이 발굴됐다. 발굴 유해 중에는 서귀포시 정방폭포에서 집단 학살돼 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알려진 3면(서귀·중문·남원면) 희생자 13명과 모슬포 지역에서 총살돼 백조일손지묘에 매장된 줄로만 알았던 희생자 7명의 유골도 발굴됐다. 4·3의 불법성과 비극 앞에 유족과 도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지만 유해를 찾아도 오랫동안 기다려온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경우는 일부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유해 400구가 발굴됐지만 DNA 검사로 신원이 확인된 것은 92구로 나타났다. 보수 정부가 들어서면서 예산 중단 등으로 유해발굴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나머지 유해 308구에 대한 신원확인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별도봉 일본군 갱도진지 앞에서 발굴된 4·3유해. 한라일보DB

게다가 유골들이 장기간 자연 상태에 노출돼 DNA가 훼손되면서 법의학에서 기본적으로 이용하는 STR방식으로는 한계를 보이는 등 어려움이 크다. 다만 훼손된 DNA도 정밀 분석할 수 있는 'SNP'라는 신기술이 나왔지만 1구당 400만원에 육박하는 검사비로 인해 대대적인 검사에는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다. 발굴의 주 목적이었던 제주시 북부지역 예비검속자(약 500명)의 유해는 고작 13구만 발견됐다. 아직 제주국제공항 내에 더 많은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추가 발굴을 통해 하루빨리 유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제주공항 유해발굴과 관련 제주도는 지난해 제주4·3연구소에 위탁해 '4·3 행방불명인 유해발굴 예정지 긴급 조사용역 보고서'를 발간했다. 지난달 30일부터는 지적측량 작업을 시작 본격 발굴이 이뤄질 예정이다.

장윤식 제주4·3평화재단 총무팀장은 "이번 발굴의 주요 목표는 북부예비검속(당시 제주경찰서 관내) 희생자를 찾는 것"이라며 "공항 외에도 조천읍 선흘리와 북촌리, 제주시 도두동, 대정읍 구억리에서도 발굴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자문위원=문성윤 변호사, 박명림 연세대교수, 박찬식 제주학센터장, 양윤경 4ㆍ3유족회장,

특별취재팀=이윤형 선임기자, 표성준 차장·송은범 기자

66년만 아버지 유해 찾은 김명수씨
"이념논쟁 떠나 유족들 품에 빨리 안겨줘야"


"원망은 없어요. 제가 살아있을 때 돌아와 주셔서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2014년 6월, 희생자 유족 김명수(70·사진)씨가 아버지의 유해를 66년 만에 찾으면서 한 말이다. 김 씨의 아버지(당시 32세)는 4·3의 광풍이 몰아치던 1949년 지금의 제주제일고 인근 보리밭에서 농사일을 하던 중 군경에 붙잡혔다. 이후 불법 군사재판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같은 해 10월2일 정뜨르 비행장에서 총살됐다.

김 씨는 어린 시절 주변으로부터 '4·3때 사형 당한 사람의 아들', '애비없는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며 자랐다. 하지만 가족들 중 아무도 아버지가 무장대와 전혀 무관한 평범한 가장이자 농부였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당시에는 4·3피해자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됐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묻힌 곳이 정뜨르 비행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 보안 구역이라는 이유로 시신 수습은 엄두도 못냈죠. 아, 제주공항이 들어서기 전에 오름 하나가 있었는데, 저희 할머니가 혼자 그 곳에 올라가 비행장을 바라보며 통곡하는 모습은 떠오릅니다."

김 씨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아버지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 것은 2007년 제주공항에서 유해발굴이 이뤄지면서 부터다. 이에 김씨는 60여년을 속으로만 삼켜왔던 질문을 큰어머니에게 던진다. '아버지는 어느 산에서 싸우다 돌아가셨나요?'라고.

큰어머니는 "'너희 아버지는 폭도가 아니다. 가족들 배고프게 하지 않으려 밭일 나갔다 억울하게 희생된 것이다'라며 크게 역정을 내시더라라고요. 그 말을 듣고 60년 동안 아버지를 오해한 게 너무 한심하고 미안해 눈물만 흘렸습니다."

김 씨는 유해발굴 현장을 수시로 방문 일손을 거들었다. 처참하게 묻혀 있던 유해들을 보면서 '저게 내 아버지일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현장에서 유골을 보면 '자리젓'이 생각나요. 수십 년 뒤엉켜 있으니 살은 녹아 없어지고 뼈만 4겹, 5겹 뭉쳐 있으니 젓갈이 따로 없었습니다."

유해 발굴은 마무리 됐지만 김 씨가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7년이 지난 후였다. 이명박 정부 당시 DNA 감식 등 관련 예산 지원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애타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제주도 자체 예산으로 1억 원이 지원되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수 있었다. 4·3 당시 6개월도 채 안된 갓난아이가 66살 초로의 노인이 돼서야 32세에 돌아가신 아버지 유골을 마주한 것이다.

김 씨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고서도 따로 가족묘지에 옮기지 않고 4·3평화공원에 마련된 봉안관에 안치하고 있다. 가족묘지보다는 수십 년 땅 속에서 함께 뒤엉켜 있던 희생자들과 지내는 게 더 낫다는 판단에서다.

김 씨는 올해 다시 재개된 유해발굴사업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유족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유족들의 나이도 대부분 70세 이상 이에요. 이제 이념 논쟁을 떠나 하루라도 빨리 유족들의 품에 부모님 혹은 형제의 유해를 안겨줘야 합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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