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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주의 제주살이] (17)새해의 산문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입력 : 2022. 01.04. 00:00:00
아침 일찍 애월까지 가야 할 약속이 있어 눈을 뜨자마자 씻고 집을 나섰다. 어제 내린 눈이 얼어붙어 차를 가지고 언덕을 내려갈 수 없었다. 다행히 집에서 백 미터만 나가면 정류장이 있어 버스를 타고 갈 요량으로 외투 옷깃을 잡아매고 털모자를 눌러쓴 채 도롯가에 서 있자니 세상에서 가장 큰 창을 마주한 듯 바다는 멀리 물러나 있는 미색으로 다가왔다. 버스는 제시간에 오지 않았다.

그때 이웃 빌라에 세 사는 삼심대 초반의 여인이 작은 카트에 무언가를 싣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귤밭을 갈아엎은 채 놀리고 있는 건너편 빈 땅 안으로 들어갔다. 거긴 마치 공사장이나 고물상처럼 큰 가림막이 쳐있고 그 안엔 헌 기계 부품들이 널려 있으며 컨테이너까지 있어 미관상 이웃들의 불평을 사는 바로 그 땅이다. 여인은 허리를 숙이고 카트 위의 비닐봉지에서 내용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뒤에서 보니 마치 두터운 누빈 외투를 열고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정성스레 내려놓는 모양새이다. 마을 헤어숍에서 일하는 여인으로 딴에는 외롭고 힘들어 보이지만, 주위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여인이다. 그 집에 가끔 지인들이 놀러오면 밤새 먹고 마시고 떠들어 조용한 동네가 요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여인과 내가 얼굴을 제대로 마주친 건 한 번뿐이다. 어느 날 현관문을 밀고 나가니 여인이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마당 안으로 들어와 화단을 구경하고 심지어 뒤뜰까지 둘러보고 나가는 참이었다. 나는 아무 표현도 하지 않았지만,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 지 5분도 안 돼 열댓 마리 길고양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여인은 쇼핑백에서 꺼낸 플라스틱 그릇들을 하얀 눈밭 위에 하나씩 올려놓고 검은 비닐봉지에 든 사료를 차례로 조심스레 놓아주었다. 그런데 지켜보니 수십 개의 그릇이 쇼핑백에서 나오는데, 고양이 한 마리에 두 개씩의 그릇을 주어 사료와 물을 따로 주고, 더욱이 보온통에서 더운물을 따라 일일이 찬물과 섞어서 주는 것이었다. 마치 지휘자처럼 머뭇거림도 없이 몰입해 고양이들을 나누고 한쪽으로 몰며 자기 할 일을 해낸다. 여인은 그중 약해 보이는 고양이 몇 마리를 컨테이너 옆으로 따로 불러 밥을 주고, 고양이빗을 꺼내 털이 곤두선 고양이들의 털을 빗겨주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상처받은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둘러 모여 있는 세상을 보는 거 같고 글쎄, 이 추운 아침에도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의 생명을 사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침 눈발이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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