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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철의 목요담론] 탈문자 시대, 서예의 동시대성(同時代性) 찾기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입력 : 2022. 03.24. 00:00:00
당초 그림과 문자는 근원이 같다. 신석기 암각화를 보면, 그림이 선(線)으로 단순 기호화되고 이후 문자추상체가 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이 자연을 다루듯이 서예는 이런 추상체를 다루므로 조형예술이라 한다.

통상 서예의 발달은 글씨체의 발달로 인식하는 편이다. 서체는 전서, 예서의 시대를 거쳐 초서, 행서, 해서 순서로 정리된다. 전서, 예서,해서는 실용을 전제로 한 관방(官方) 공식문체인 반면, 행서와 초서는 개성과 자율적 편의성으로 예술심미를 기반한 서체다. 우리가 과거로 회귀해 서성 왕희지 처럼 글씨를 잘 썼다고 지금에 예술일 수는 없다. 미학적으로 글씨가 예술이기 위해서는 문자의 실용을 뛰어넘어, 유희적이고 개성적이며 시대심미를 담아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서예는 지나치게 기술과 시간, 공력으로 역량을 응축시켜 합의된 역사의 길을 걸어왔는지 모른다. 개성과 자유로움이 억제된 모방으로 새 길을 찾을 수 없다. 예술에서 합의는 결코 조화가 아니라 동화며, 누구나 도출할 수 있는 것은 창신이 아니라 재생이기 때문이다. "사로(思路)가 있어야 출로(出路)가 있다"는 말이 있다. 수구적인 생각을 바꿔야 한다. 예술은 항상 새로운 것이지, 옛 것만으로 예술일 수 없는 속성을 갖고 있다.

"선사시대에 소통의 코드가 그림이었다면, 역사시대의 코드는 텍스트이며, 탈 역사시대의 코드는 기술형상이다"(빌렘 플루서). 서예의 실용적 가치가 소멸돼가는 이즈음에, 서예의'실용성과 예술성'에 관한 문제는 시대가 풀어야할 과제다. 예술도 대중과 소통한다. 지금의 탈문자(영상, 컴퓨터)시대에서 문자를 텍스트로 하는 서예가 앞으로 어떤 양식으로 바꿔야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케 한다. ‘서예란 우리시대에 무엇인가?’근원적인 질문이 필요할 때다. 이는 시대에 민첩한 현대미술과 달리 변화에 둔감한 서예의 생존에 대한 의문이자, 시대성을 준비 못한 것에 대한 질책이기도 하다.

예술도 시대와 더불어 살아간다. 전통의 가치도 시대에 맞춰 수정되고 진화하면서 변증법적으로 생명력을 유지한다. 지금은 다원화된 융합의 시대다. 시각의 초점을 서예 바깥세상에 둬야 한다.

서예도 지필묵의 표현의 한계를 뛰어 넘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비록 주변예술과의 혼융으로 미학적 기준을 설정하는 일이 어렵더라도 다양성을 추구하고, 모순의 논점을 초월해 사고를 확장하며 시대미를 읽는 지식, 미래를 보는 혜안이 요구된다.

새로운 것은 항시 내 안에서 번민하고 경계점에서 저항하며 일탈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동시대성을 구하는 이러한 도전 없이 미래를 열 수 없다고 생각한다. 탈문자시대에 서예가 그렇다. <양상철 융합서예술가.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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