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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주의 제주살이] (32) 비망록 : 스승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입력 : 2022. 05.03. 00:00:00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들른 양평 양수리 한 묘원에 라벤더는 피어 짧은 회상은 빛과 색으로 어룽지고 스승이 잠들어 계시는 산비탈엔 시간도 나선으로 지나는 것 같았다. 최하림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두 번째 시집을 열음사에서 내면서부터였다. 그때 선생님은 열음사 편집주간 일을 보고 계셨다. 그 후 선생님을 뵙는 일이 잦아지고 우리는 어느 뒷골목 같은 데서 별말 없이 술잔을 나누곤 했다. 세월이 강같이 흐르며 선생님의 삶도 변하고, 내 삶도 변해 우리의 만남도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했지만, 선생님은 어디서나 시를 쓰는 여린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 스승이셨다.

나는 몇 군데 대학에 출강을 다니며 국제사랑의봉사단 일원으로 아프리카를 오가다 어느 날 탄자니아로 파견되어 마사이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3년을 보내게 되었다. 먹오딧빛 아이들의 열망과 다양한 가난의 모습 속에 끼어 내가 했던 일들이 시를 쓰는 일보다 더 나았는지 알 순 없지만, 그게 내 인생에서 잠시 시를 놓게 만든 건 사실이었다.

여러 나라를 다니다 2000년 말, 7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나는 한국의 분주한 도시 생활자로 탈바꿈했다. 어느 날 문학평론을 하는 벗 이경호를 만났더니 "최하림 선생이 너를 만나면 꼭 전해주라고 하셨다. 시를 쓰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두어 달이 지났을까. 어느 날 소설을 쓰는 김훈 선배가 사무실로 찾아와 다시 똑같은 말을 전해주고 갔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서 두 번째 듣자 한 인간의 생로병사 같은 어쩔 수 없으면서도 겪어야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고, 혼자 사무실에 우두커니 남아 있는데, 어느 순간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누가 내게 그런 말을 해주겠는가.

며칠 후 나는 과자를 싸들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아프셨다. 그 후 나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선생님 댁을 방문했고, 선생님은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계시다가 내가 가면 일어나 마룻바닥에 앉으셨다. 그 후 10년 동안 나는 연달아 5권의 시집을 내고 선생님은 그중 한 권의 시집에 해설을 써주시고, 다른 한 권의 시집엔 표4 글을 주셨다.

선생님이 타계하시고 찾아간 집 서재엔 선생님이 마시다 만 커피잔이 반쯤 차 있었다. 주인이 잠깐 외출이라도 한 듯 아무것도 치워지지 않은 채 모든 게 그대로였다. 1년쯤 지난 어느 날 저녁 어스름에 겨워 나는 문득 선생님 핸드폰 전화번호를 눌러보았다. 아, 신호가 갔다. 그리고 누군가 전화를 받고는 "네. 최하림 선생 핸드폰입니다." 라는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까지 사모님은 선생님의 핸드폰마저 그대로 탁상에 켜두고 계셨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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