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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觀] 예술의 자리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입력 : 2022. 08.26. 00:00:00

다큐멘터리 '작은새와 돼지씨'.

[한라일보] 2022년 상반기에 읽은 책들 중 인상에 깊이 남은 책을 꼽자면 이순자 작가의 유고 산문집 [예순 살, 나는 깨꽃이 되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2021년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작인 [실버 취준생 분투기]라는 수필로 SNS에서 많은 화제를 모았던 이순자 작가는 1953년생으로 예순이 넘어 취업전선에 나서고 일흔이 되어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한 이다. 많은 이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긴 글을 쓴 그는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딸이 어머니가 남긴 글을 모아 출간한 책 [예순 살, 나는 깨꽃이 되어]에는 노년의 여성이 버텨내기 힘든 시대의 어둠과 그 어둠을 뚫고 나오게 만드는 글쓰기에 대한 이순자 작가의 열망이 가득 담겨있다. 책 한 권을 출간하는 일이 프로필이 되는 시대에 평생을 글쓰기에 정진한 이의 글은 쉬이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하고 뭉근했다. 오래, 천천히 끓어오른 마음으로 쓴 그의 문장들은 예술이 한 인간의 일상에 어떤 재료와 도료가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오는 8월 25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작은새와 돼지씨]는 일상의 한 켠에 예술 창작의 자리를 마련해 놓은 한 부부의 이야기다. 주부인 '작은새' 감춘나 씨와 경비원인 '돼지씨' 김종석 씨는 자신들의 전시회를 준비하는 부부다. '작은새'는 서예와 그림을, '돼지씨'는 시를 쓰는 화가이고 시인이며 그들에게 예술은 일상에서 멀리 있지 않다. 캔버스 앞에 앉는 일이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작은새'와 이면지와 낡은 편지지 등에 누구보다 자유롭게 시상을 펼쳐내는 '돼지씨'의 자연스러운 풍경이 부부의 딸 김새봄 감독의 카메라에 다정한 시선으로 담겨있다. 긴 시간 함께 슈퍼를 운영했던 부부는 삶의 틈을 예술의 시간들로 채워왔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이들에게 아름다운 화원을 선물했다. 예술의 씨앗인 일상을 일구고 가꾼 이들이 거둔 수확은 풍성하고 다채롭다.

예술이라는 말은 멀리 있는, 닿기 어려운 영역처럼 느껴진다. 남과 다른 재능 없이는 진입이 불가능한 영역 같기도 하고 모두가 인정할 만한 평가를 받는 예술 또한 드물기에 확신을 갖기에도 어렵다. 게다가 뭔가 대중성과 멀리 있어야 예술이라는 말과 더 어울리게 느껴지기도 해서 더욱 정체를 알 수가 없기도 하다. 심지어 거의 모든 예술의 영역은 문턱이 높다. 등단과 수상, 오디션과 입상 등 시작 단계에서부터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아야 기회가 주어진다. 수치나 데이터로 평가할 수 없는 영역, 일상에서 태어나지만 일상적 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그것, 예술. [작은새와 돼지씨]는 이 모든 복잡한 단상들 위에 그려진 그림이고 써 내려간 시구다. 거창하고 거대하게 느껴지는 예술의 문턱을 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예술의 자격이라는 관습과 편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것이 예슬이며 누가 예술가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 본 이들이라면 [작은새와 돼지씨]는 그 질문에 대해 다정한 답을 건네는 영화다.

얼마 전 엄마는 내게 컬러링 북을 사달라고 했다. 꽃이 많은 그림이면 좋을 것 같다고. 책을 골라 우편으로 보냈는데 며칠 뒤 엄마는 색연필로 곱게 색칠된 페이지들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어렵기도 한데 재미있다고, 색칠하고 있을 때 마음이 참 좋다고. 어렵지만 재미있고 하는 동안 마음이 좋은 일. 나는 엄마가 색연필을 들고 꽃 그림을 들여다 보면서 어떤 색을 칠할까 고민하는 순간이, 그리고 생활의 한 켠에서 그 순간을 위해 내어놓은 공간이 예술의 자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진명현 독립영화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전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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