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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농업유산-제주의 화전(火田)] (1)프롤로그
제주의 원초적 농경문화·마을 공동체 역사 함축
이윤형·백금탁 기자 yhlee@ihalla.com
입력 : 2023. 07.06. 00:00:00
땅은 메마르고 백성은 가난한
‘지척민빈’의 척박한 곳 제주
화전 일구며 토양 한계 극복

소중한 유산임에도 조명 안 돼
지금은 잊혀지고 사라진 존재
실체 및 역사·현재적 의미 조명


[한라일보] 화산섬 제주도의 토양은 척박하다. 섬의 대부분 면적은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화산회토, 즉 '뜬 땅'으로 덮여있다. 예전부터 일부 해안지대를 중심으로만 연작이 가능했고, 나머지는 연작이 거의 불가능했다. 노동력을 집중해도 토지의 생산성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화산회토를 일구며 살아가야하는 섬사람들의 생활은 곤궁했다. 그래서 척박한 토양을 일구며 가난한 삶을 이어가는 제주도의 실정을 두고 '지척민빈'(地瘠民貧: 땅은 메마르고, 백성은 가난하다) 하다고 했다.

이형상(1653~1733) 제주목사의 '남환박물'에는 '이 지방 밭들은 하중(下中)이다. 흙은 검고 부풀어 기장, 피, 메벼, 차조, 콩, 보리, 메밀, 사탕수수 등을 심기에 적당하다'라고 하고 있다. '하중'은 토질 등급에 있어 9등급 중에 8번째의 땅으로 토질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말한다.

주민들이 화전을 일구던 서귀포시 영남마을 전경 항공사진으로, 4·3 당시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특별취재팀

제주인들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척박한 토양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화전(火田)을 일구며 마을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켜왔다. 화전은 산간지대나 고원 지역에 불을 놓아 잡목 등을 태운 뒤 농사짓는 농경 형태의 하나다. 화전 농업은 동양에서 가장 오랜 농경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의 화경(火耕)이나 일본의 야키바타(燒畑)도 화전과 같다.

화전의 역사는 섬으로 분리된 제주도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유지 발전해온 생업경제와 마을의 등장·형성·확산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화산섬 제주에서 정주 흔적은 지금부터 1만 년 전을 전후한 시기에 해당하는 초기 신석기 시대 고산리유적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 사람들은 일시적인 주거지를 유지하고, 수렵과 채집활동 중심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기시대 거점취락인 서귀포시 예래동유적 단계에서는 당시의 생업경제와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다량 출토된다. 예래동 유적은 기원전 4세기 전후한 시점부터 제주 서남부 지역 거점취락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지난 2008~2009년 대규모 발굴조사에서 주거지 265동과 2493기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됐다. 유적의 중심 시기는 기원전 3세기~기원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김경주(제주문화유산연구원)의 '철기시대 제주 서남부권 취락의 석기조성비와 생업경제-예래동 취락을 중심으로' 논문에 따르면 이 유적에서 분석된 탄화종자로 쌀, 밀, 보리, 콩, 팥, 도토리 등 700여립이 확인됐다. 식물규산체 분석을 통해서는 일부 벼규산체도 확인되지만 쇠풀족과 기장족 중심의 밭작물 재배가 가장 많이 산출됐다. 이는 당시 주민들이 수렵과 어로는 물론이지만 채집식물과 야생곡물류 등을 중심으로 한 생업경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농경은 노동집약적 밀집 농경이 아닌 넓은 면적에 뿌릴 수 있는 씨가 적은 노동절약적 조방 농경이 중심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마을유적에서 이뤄졌던 이 같은 원시 농경 형태는 이후 화전 경작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문헌기사를 보면 '천지(天智) 8년(669) 탐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자 오곡종자를 주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오곡은 조, 보리, 대두, 팥, 벼(피) 등 화전 경작에 유리한 잡곡과 두류가 중심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 시대에 이어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에 접어들면 삼양동 유적을 필두로 용담동, 외도동유적, 동쪽으로는 김녕리, 종달리, 서쪽으로는 곽지리, 남쪽으로는 화순리, 강정동, 토평동 등 제주섬 곳곳으로 고대마을이 차츰 확산,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고대마을의 확산은 탐라시대와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마을 공동체로 이어지는 토대가 된다.

제주의 한학자 소농(素農) 오문복 선생이 '화전민들의 생활과 경작형태'(1987) 글에서 "우리 제주인은 화전민의 후예인 셈이요, 또 화전민의 피가 우리의 핏줄 한가닥에 흐르고 있다고 봐도 망언이 아닐 것이다"라고 한 이유를 짐작할 만 하다. "제주 농경문화의 뿌리가 화전이며, 모든 제주인은 다 화전민 후예"라는 것이다.

주민들이 화전을 일구던 서귀포시 영남마을의 계단식 화전이 뚜렷하다. 특별취재팀

화전은 한반도에서도 1970년대 전반까지 이뤄졌다. 광복과 더불어 화전민은 전국적으로 거의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1955년 조사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3088호에서 6·25전쟁 후의 식량난으로 1961년 6427호, 1965년 1만8380호, 1967년 1만7200호로 증가했다. 그러자 정부는 1968년 '화전정리법(火田整理法)'을 공포하고 정리에 나섰다. 이후 주로 강원도 산간지방에 남아 있던 화전민을 다른 지방에 정착시키면서 1976년 화전 정리가 종결됐다. 현재 화전은 법령으로 금지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제주에서는 화전이 상당한 규모로 행해지고 있었다. 제주도의 화전 면적은 1919년 2004단보이었으며, 이후 점차 감소해 1924년에는 1413단보로 나타났다. 조선총독부가 1926년 발간한 공식자료로 당시 화전이 상당한 규모로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6년 말 제주 화전민은 5000명에 이른다. 이후 명맥을 유지하던 화전과 화전마을은 제주4·3사건 당시 주민들이 해안마을 등지로 소개를 당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제주의 화전과 화전마을에는 이처럼 오랜 시간, 역사의 흐름 속에 축적된 다양한 요소들이 녹아들어 있다. 주민들의 정주 형태와 마을, 가옥 구조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제주 농경 문화의 뿌리와 목축문화, 마정사, 한말의 민란과 일제강점기, 제주4·3사건에 이르는 고난과 비극의 역사를 이해하는 단초이기도 하다.

오늘날 화전 마을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개발 바람은 화전 마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평화로웠던 삶의 터전에는 리조트가 들어서는 등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본보의 기획은 20세기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지고 사라져간 화전과 화전마을에 대한 조명이다. 기획을 통해 화전과 화전마을의 실태를 들여다보고 현재적 의미와 함께 마을공동체를 엿볼 수 있는 미래 자산으로서의 활용방안을 모색해 나갈 계획이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제2사회부장/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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