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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觀] 만세 삼창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입력 : 2023. 08.18. 00:00:00

영화 '지옥만세'.

[한라일보] 사는 게 지옥이라고들 한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믿을 건 나밖에 없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데 나를 지옥에 빠뜨리는 건 결국 나라고도 한다. 사는 거 뭘까, 지옥 어딜까 그리고 나는 누굴까. 때로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어디를 나가지 않아도 하루 온종일이 지옥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니, 나는 지옥에 가보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미디어를 통해 학습된 지옥은 나의 일상과는 사뭇 다르다. 그렇게 펄펄 끓지도 않고 그만큼 화려하게 컴컴하지도 않다. 청소와 설거지, 빨래와 밀린 업무 등을 한데 뭉쳐 방구석으로 밀어 두고 한숨을 길게 내뱉자 허기가 밀려온다. 직립보행이 불가능한 심정적 상태, 기어가듯 냉장고로 향해 냉동실에 있던 식빵을 꺼내 구운 뒤 굴러다니던 땅콩 잼을 듬뿍 바른다. 아 천국의 맛이다. 행복하다. 나 토스터 있음에 감사하고 바닥을 드러내지 않은 땅콩 잼 있음에 감사하다. 에어컨을 켠다. 천국이 여기고 지옥은 일순간 사라졌다. 갑자기 친구의 문자가 온다. 삼겹살을 쏘겠단다. 이제 나는 이 천국에서 다른 천국으로 간다. '그래 사는 게 이 맛이지'라고 생각하며 천사 같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문을 연다. 폭염의 노여움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세상에 지옥 같은 날씨구나. 도대체 하루에 몇 번이나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걸까 생각해 보니 묘한 웃음과 희미한 짜증이 몰려온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등의 단편을 통해 독립영화계의 기대주로 손꼽혀오던 임오정 감독의 첫 장편 '지옥만세'는 발칙한 제목의 로드무비이자 어드벤처물이다. 또한 밀림 같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왕이라고 생각하는 이를 처단하러 가는 사적 복수극이자 학교 폭력과 종교 비리가 뒤엉킨 K-리얼리티 드라마인 동시에 예측하지 못한 지점마다 경쾌한 웃음 세례를 퍼붓는 블랙 코미디이기도 하다. 학교 폭력과 왕따의 피해자인 두 친구 송나미와 황선우가 길을 나선다. 남들은 수학여행길에 오르는데 둘은 기스 투어를 선택한다. 송나미와 황선우의 인생에 수많은 스크래치를 내고 서울로 간 가해자 박채린의 인생에 단 한 번의 기스라도 내기 위해서, 그 흠집 하나 못 만들어주면 죽는 것도 억울할 거 같아서 둘은 죽을 것 같은 지옥의 삶에서 그렇게 갑작스레 생에 박차를 가한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 서울에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유학길에 오를 줄 알았던 박채린이 기묘한 종교 집단에서 낙원으로 가는 오디션을 보고 있다니. 게다가 셀프 개과천선해서 받을 마음도 없는 사과를 시전하고 용서를 입에 달고 사는 신도가 되었다니. 너 죽고 나 죽고로 시작한 나미와 선우의 여행은 얼떨결에 박채린의 구원열차에 동승한 꼴이 되어버린다.

'지옥만세'는 침침한 어둠에 갇힌 이들에게 희미한 빛 한 줄기를 보여주기 위해 송곳 같은 결기로 세상의 곳곳에 구멍을 내는 영화다. 여기가 안 뚫리면 다른 쪽으로 거기도 막혀 있으면 또 다른 곳으로. 그렇게 뚫린 작은 구멍을 통과하는 실낱같은 빛의 투과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고 볼 수 없었던 것을 만지게 한다. 이 '기어코와 마침내의 영화'는 그렇게 죽고자 하던 절망의 입에서 죽겠지만 죽을 수 없다는 희망을 말하게 만든다. 각자도생이 어느덧 국룰이 되어버린 지금의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나 하나를 살리고자 구원에 매달린다. 종교는 어느 곳에서나 발견된다. 견고한 취향이 종교가 되고 경제적 안정이 종교가 되며 달콤한 사랑과 시큼한 중독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옥 같은 세상을 한탄하며 살아간다는 말부터가 우리가 삶에 다가서기 위해 얼마나 애쓰며 사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나미와 선우 그리고 채린 또한 마찬가지다. 복수라도 해야 숨통이 트일 것 같은 나미와 선우, 사이비 종교에 의지해 구원받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채린 모두 어떻게든 나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다. 애쓰는 이들의 행보는 늘 그렇듯 진창에서도 길을 낸다.

'지옥만세'는 비극적 여정의 시작을 뚜벅뚜벅 가로질러가며 세상의 지도를, 누군가가 건네준 나침반을 무력하게 만드는 영화다. 길을 찾고 문을 열고 실체를 확인하는 일. 거기가 천국인지 여기가 지옥인지 체험하고 체화하는 일.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시종일관 생생하고 씩씩하다. 거기에는 각기 다른 서로를 믿고 자신을 의심하지 않은 오우리, 방효린, 정이주라는 신인 배우들의 걸출한 연기의 덕이 크다. 한국영화의 위기라는 말들로 점철된 불안의 지옥에서 만세 삼창이 될 세 친구를 믿으라. 오키오키. 천국이 멀지 않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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