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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觀] 거짓말이 보이면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입력 : 2024. 05.31. 00:00:00

영화 '그녀가 죽었다'.

[한라일보] 외로움은 치명적인 질병이다. 언제 누구를 급습할지 예측할 수가 없고 그 크기와 위력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지독한 내상은 그래서 한 사람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도 한다. 하지만 쉬이 드러나지 않기에 그 변화의 진폭을 외관상으로는 감지하기 어렵다. 항상 웃고 있던 누군가가 어느 순간 섬찟한 면모를 드러낸다면 아마도 그는 전에 알던 그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섬찟함 속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들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에도 반응하지 못할 수 있다.

신예 김세휘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배우 변요한과 신혜선이 주연을 맡은 영화 '그녀가 죽었다'는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남자와 자신의 삶을 흠집 내는 여자의 이야기다. 두 사람 다 타인들이 알아서는 안 될 자신들만의 비밀들로 각자의 일상을 채워가는 이들이다. 남자의 직업은 공인중개사다. 그는 타인의 공간으로 몰래 들어가 일상의 일부를 훔쳐 전시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을 가졌지만 그는 누구와도 자신의 삶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저 타인의 은밀한 조각들을 큐레이션 하는 수집벽으로 만족감을 느낄 뿐이다. 그의 취미는 불법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른바 이 호기심 많은 좀도둑의 일상을 모조리 깨뜨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동안 일상의 일부만을 훔쳐오던 타인의 전체가 그를 덮쳐오는 일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한 여자의 비밀이, 폐부가, 악행과 고통이 문을 열고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녀가 죽었다'는 마음 줄 곳 없이 기행을 일삼는 인물들을 따라가며 관객들로 하여금 탄식을 내뱉게 하는 영화다. 경범죄로 시작해 각종 범죄들이 난무하며 속속들이 파헤쳐지는 타인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하고 있자면 영화 속 관음을 취미로 하는 주인공의 처지가 지금의 나와 다르지 않음에 놀라게 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타인이 전시한 삶의 일부를 들여다보는 일이 너무 비일비재해서 감각하지 못했던 것들, 이를테면 일면만을 보고 전체를 평가하는 일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쉽게 좋아하고 너무 빠르게 취소하는 삶의 급류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개인 미디어의 발달로 스타는 동시다발적으로 탄생하고 있고 동시에 누구도 모르게 소멸되고 있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시대, 재기라는 말이 불가능해진 시대, 무결하고 무해해서 손가락질할 일 없을 누군가를 끊임없이 스크롤하는 시대. 어쩌면 '그녀가 죽었다'에서 누구와도 자신의 선택을, 외로움의 이유와 고통의 범주를 논하지 않았던 두 사람이 조금 더 빨리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접촉의 면적을, 맞닿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면 그들의 삶은 달라졌을까. 외로움을 거짓말로 둘러싼 누군가의 포장지가 찢어졌을 때 덩그러니 놓여진 그 감정의 말들을 조금 더 골몰하게 바라봐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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