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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72) 한림읍 수원리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입력 : 2024. 09.06. 03:00:00
마을공동체 정신 가득한 아름다운 농어촌




섬 제주에서 밭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하염없이 부러워하는 흙을 보유한 마을이다. 전통적으로 한 마지기 농토를 150평 정도로 계산했지만 수원리의 밭은 120평. 그만큼 소출이 좋은 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농업생산성을 기반으로 번창해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김윤홍 이장

제주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28㎞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귀덕2리, 서쪽으로는 한수리, 남쪽으로는 대림리와 이웃하고 있다. 취락지역과 농경지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풍광을 지니면서 바다 방향으로 둥글게 튀어나간 느낌을 주는 해안절경과 조화를 이루는 자연과 사람이 아름답게 공존하는 잠재력 큰 마을. 옛 이름은 조물캐라고 불러왔다. 조물캐란 뜻은 용천수가(큰물, 생이물, 돈지물, 개물, 솔패기물, 엉물, 쇠물, 중이물, 모시물 등) 모두 11개소가 만조 때에는 전부 바닷물 속에 잠기는 까닭에 조물캐라고 했으며 한자로 풀어서 잠수포(潛水浦)라고 했다. 세월이 흐르고, 넓은 해안지대 공동어장 186.6㏊에서 생업을 영위하던 해녀들이 사망사고가 많이 발생하던 해에 1882년(고종19년) 마을 유지들이 협의해 수원리로 개명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원리(洙源里)는 공자가 제자들을 훈육하던 곳의 지명을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마을 이름 개명 당시에 유교적 가치관이 깊이 뿌리내렸던 마을이라는 의미가 된다. 자연마을은 일주도로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며 웃동네, 중동네, 알동네, 안동네, 앞동네, 큰물동네와 수전동 및 본동과 1㎞ 동쪽에 위치한 용운동(옛 지명 가좌외)이 있다.

해안도로는 그 자체로 명소다. 조간대의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해변 풍광이 농업 경관과 어우러져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거기에서 만나는 다양한 스토리텔링 자원 중에 으뜸은 구룡석 전설이다. 여의주 하나를 놓고 다투던 아홉 마리의 어린 용들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너무 많은 피해를 입자 하늘에 지극정성으로 빌었더니 하늘이 감복해 그 여의주를 돌로 만들어버렸다. 그러자 용들이 모두 떠나고 커다랗게 둥근 돌만 남아 평화를 다시 찾은 상징으로 마을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 구에 가까운 큰 돌을 가지고 지혜로운 훈육 가치를 만든 것. 자식들의 재산 싸움을 경계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과도한 해석일까?

김윤홍 이장에게 수원리가 보유한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간명하게 대답했다. "역지사지 정신입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마을공동체문화가 있다면 합리적 배려라고 했다. 어린 시절 구룡석 전설을 들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공감대가 정신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마을 발전의 원동력과 같은 이 마음가짐이 최고의 자산이며 보물이라는 주장. 탁 트인 마을 풍광처럼 수원리 마을 사람들의 심성은 열려있다. 막힌 곳이 없다는 것은 충돌의 여지가 없음을 의미하며 뻗어나갈 방향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된다. 안타까운 현실은 주거지역이 한정된 관계로 고향으로 귀농을 하고 싶어도 신축 건물 부지가 없어서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부모님 중에 한 분이라도 살아계실 때 와서 농사를 지어야 연결고리가 형성되는 것이 현실인데' 주거 문제에 발목이 잡혀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이 빈번하게 속출하고 있으니 이러한 현실을 흡수하고 방법을 찾아줘야 하는 것이 행정과 정치권의 의무다. 방대한 농경지를 보유하고 있는 마을의 특수성을 고려해 차별화된 정책이 필요하다. 30만 평에 육박하는 비옥한 저 농경지가 자연스럽게 대물림 되도록 행정적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불굴의 의지로 개척의 역사를 써내려온 수원리의 농업자원은 머지않은 장래에 위기를 맞게 될 것이 자명하다. 경로당에 어르신들이 평생을 함께 해온 농경문화가 다음 세대에게 온전하게 대물림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저분들이 커다란 후견인이 되어 자녀들의 귀농 길잡이 역할을 해줘야 한다. 시간이 없다. 사람 살아가는 대물림이 아니고서는 저 농토를 살릴 방법이 없다. <시각예술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신화가 길을 열다
<수채화 79cm×35cm>


1972년, 35만 평 농경지 정비사업의 결과 만들어진 풍경이다. 구불구불 곡선이었던 밭들이 바둑판처럼 바뀌었다. 기계화 영농을 위한 직선 농로들이 시원스러운 원근감을 제공한다. 그리는 내내 그 시대를 살았던 이 섬의 정신문화 주역들을 떠올렸다. 농경지에 큰 도로를 여러 개 내고, 꾸불꾸불한 곡선은 직선으로 바꾸는 과정이 어떤 국가적 강제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토지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동의에 의하여 이뤄진 전국 최초의 사례. 이 모습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 손해를 봐야 한다.'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신화다. 이타행(利他行)의 상징이다. 여기서 타인이란 마을 공동체의 미래다. 자신의 밭이 잘려 나가는 손실을 설명 듣고서 "경허민 나가 손해 봐불지 뭐, 마을 일인디."

그런 마음이 모이고 모여서 이룩해낸 이 그림은 풍경화이기에 앞서서 역사화다. 자신의 득실을 먼저 생각하면 아무 일도 성사되지 않는다는 정신무장의 소산을 그리려 하였다. 제주인의 정신문화를 그리는 마음으로 돌담 하나하나를 쌓듯이 그렸다. 뙤약볕 내리쬐는 9월 초순의 밭들은 속에서 무척 바쁘다. 저 놀라운 자발성은 이 마을의 정신적 잠재력이며 실천적 미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멀리 오름들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이 시원하고 탁 트인 마음. 고귀한 이 섬의 정신문화를 직접 목격하려면 이 밭들의 향연을 와서 보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易地思之의 그 大地다.





평수포구 방파제
<연필소묘 79cm×35cm>


어촌으로서의 역사성을 현무암으로 쌓은 방파제를 통해 그리려 했다. 바다 표면을 그리지 아니하고서도 동양화의 여백으로 본질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도록 했으니 주제가 더욱 분명하다. 연필이 보유하고 있는 검은색과 질감이 있는 종이를 통해 오랜 세월 염분으로 검게 변해버린 현무암의 질감과 명암을 표현할 수 있어서 간명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는 내내 저 방파제가 없던 시절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작은 돛단배로 어로활동을 하던 시절 노를 저어서 정박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자연적인 포구로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었을 것이다. 왼쪽에 승애코지가 바다 쪽으로 뻗어나가 있고 오른쪽에는 무려 3000평 면적의 쇠물깍원이 바다로 툭 튀어나 있다. 그 사이에 그림 상부에 살짝 보이는 닷가지여나 발돋은여 같은 갯바위들이 있어서 너울파도를 막아주니 덕판배와 같은 이 섬의 전통 어로선박들에게 있어서는 안온한 휴식처가 되었을 것이다. 반가운 소식에 더욱 이 포구 그리기에 열정을 쏟았다. 오른쪽에 위치했던 해변자원을 복원하기 위해 마을공동체가 발 벗고 나섰다고 하니 너무도 기뻤다. 지금은 양어장으로 쓰고 있는 쇠물깍원을 복원해 옛모습 그대로 원담의 기능을 살려낸다면 참으로 장관이 될 것이다. 멸치가 들어와 가둬지면 온 마을 사람들이 바닷가에 나와서 잡던 그 아름다운 공동체문화를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 방파제의 의미가 무엇인가? 존재 자채로 안심이다. 거센 변화의 물결과 파도로부터 문화 정체성을 지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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