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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Ⅱ] (2)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⑦ 한남리 머체골 화전
잊혀진 화전생활상 뚜렷… 4·3 아픔도 ‘오롯이’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입력 : 2024. 11.14. 03:00:00
[한라일보] 한라산 흙붉은오름(해발 1391m)에서 발원하는 서중천은 약 23㎞를 내달려 제주 남동부 해안까지 이어진다. 하천의 대부분은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를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깊은 계곡과 크고 작은 물웅덩이 등이 곳곳에 있어 이 일대 젖줄이자 생명천 역할을 했다.

이형상(1653~1733) 제주목사의 기록화첩인 탐라순력도의 '산장구마(山場駒馬)'에는 서중천이 성널오름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송목당천(松木堂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당시 산장 구역은 교래리 일대와 산간, 정의현의 따라비오름과 사슴이오름 일대에서부터 수망리와 한남리 위쪽 산간지대까지다.

머체왓 숲길 일대 드론 촬영. 한라산까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특별취재팀

1967년도 항공사진(출처: 국토정보플랫폼). 붉은 원이 머체골 화전마을이고 오른쪽 검은띠처럼 보이는 것이 서중천이다. 특별취재팀

하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드넓은 초원지대는 목축과 화전 농사에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다. 한남리, 의귀리, 수망리, 가시리 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산마감독관 김만일(1550~1632)의 산장(산마장)이 이 일대에 조성될 수 있었던 이유다. 서중천은 조선시대 국영목장인 9소장과 산장의 경계 역할을 했다.



집터·우영팟·잣성 등 뚜렷


1899년 5월 제작된 '제주군읍지' 중 '제주지도'를 보면 9소장과 10소장 사이 산장과 갑마장이 위치한다. 산장은 대부분 중잣성 지대고, 그 위쪽으로는 상잣성 지대다. '제주지도'에는 이 일대 산장 위에 위치한 상잣성 너머로 '화전동'이 표기돼 있다. 이는 1895년(고종 32) 공납제가 폐지되면서 국영목장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화전 마을이 차츰 목장지대로 공간적 확산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이곳 한남리 일대에서 화전 흔적은 머체왓동네(머체골)에서 볼 수 있다. 머체왓은 이 일대가 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돌무더기가 많은 밭을 뜻하는 제주어 머체에서 비롯됐다. 머체왓에는 예전 머체골(머체왓동네, 머체왓골)로 불린 화전 마을이 자리했다. 제주4·3 이전까지만 해도 김씨, 문씨, 송씨, 현씨 등 다섯 가구가 살면서 메밀, 보리, 조, 콩을 경작하고, 사냥도 겸한 것으로 알려진다. 4·3으로 주민들이 소개되기 전 당시 이곳 아이들은 아랫 마을이었던 의귀리에 있는 국민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이후 4·3사건 와중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머체골은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머체왓숲길의 화전민터. 특별취재팀

머체왓숲길에 있는 움막터. 특별취재팀

이와 관련 한남리 거주 강 모씨는 수년 전에 "예전 해방되던 해 콩씨 반 되로 화전을 하였는데 용케 잘 되어서 콩나무가 어린아이 팔뚝만큼 살쪘다. 그래서 곡식을 벨 때도 줄기가 너무 굵어 낫(호미)으로는 베어내기 어려우면 '뫼호미'(나대 같은 연장)로 찍어 베어냈다"고 했다.

의귀리 김 모씨도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가 오무룩한 땅(조금 얕고 평평한 땅)이 있으면 거기에 불을 질러두었다가 봄이 되면 콩 씨나 팥 씨를 몇 알 뿌려두었다. 풍작이 된 때에는 팥 대여섯 섬, 메밀 여남은 섬씩 싣고 올때도 있었다"고 했다. 목자(牧者) 노릇을 하는 틈틈이 화전 농사를 하며 재산을 모았다고 했다.

머체골 화전 마을 흔적은 1967년도 항공사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항공사진을 보면 머체왓 마을의 집터가 옹기종기 모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남리 1642번지에서 1645번지까지 4가구가 있었다. 이보다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1646, 1647번지도 화전민 집터가 자리하고 있다. 머체왓 주변은 나무가 거의 없는 전형적인 중산간 평원지대다. 서중천변을 중심으로 숲지대가 검은띠처럼 형성돼 있을 뿐이다.

이곳에는 '방애혹'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예전에 주민들이 화전 농사를 했던 곳으로 밭 형태가 방아혹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잣성이 길게 연결되고, 잣성을 구분하고 이어주던 간장도 볼 수 있다.





지역주민 연계 활용방안 고민해야


진관훈 박사는 머체왓의 화전 양상을 독주화전민으로 보았다. 독주(獨住) 화전민은 마을 사람들과 살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외딴집을 짓고 사는 화전민을 말한다. 대부분이 이동(移動) 화전민 또는 국유림에 거주하는 순(純) 화전민이다. 김만일의 주요 무대가 의귀리를 중심으로 이웃한 한남리, 수망리, 가시리 지역이었으므로 머체왓에서는 목축업을 바탕으로 한 화전 농업이 성행하였다고 말했다. 의귀리 마을목장 내에 있는 수망리 화전마을과 함께 예전에는 안좌경(安坐境, 가시리 지경)으로 분류되었다.

집터 내부의 화덕 자리. 특별취재팀

집터 내부 구들시설(온돌)을 조사하는 모습. 특별취재팀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진 머체골은 숲길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되살아났다. 머체왓숲길에는 현재 200여 미터 되는 올레가 남아 있고, 올레를 중심으로 집터를 볼 수 있다. 안거리와 밧거리가 있고, 정지(부엌), 통시, 화덕자리 등이 그대로 있다. 안거리 방으로 이용했던 곳에는 불로 방을 따뜻하게 했던 일종의 온돌시설인 구들이 남아 있다. 구들은 평형한 석재를 깔아서 만든 구조로 아궁이가 남아 있어 지금도 불을 때면 온기가 피어날 듯 하다. 집터 주변은 우영팟으로 이용했던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는 경사진 면을 따라 물이 흘러들어 모이도록 한 집수정 시설도 확인된다.

머체골은 화전민의 생활상과 주거 양상, 잣성과 목축 문화, 4·3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머체왓숲길을 조성하면서 화전 마을터를 일부 복원했지만 단순 정비에 그치면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제주의 독특한 화전문화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지역주민과 연계한 활용방안 마련에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특별취재단=이윤형 선임기자·백금탁 정치부장·진관훈(제주문화진흥재단)·고재원(제주문화유산연구원)·오승목(다큐제주)>

※ 이 기획은 '2024년 JDC 도민지원사업'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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