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니 유정'. [한라일보] 타인의 비극 앞에서 진동하는 건 놀랍고 안타깝게도 호기심이다. 누가 아플 때, 슬플 때 누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그 이유를 못 견디게 궁금해 한다. 물론 명백하게 밝혀져야 할, 누군가가 억지로 파묻은 비밀도 있지만 어떤 비극의 비밀들은 그 이유 하나로만 온전히 설명이 되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당사자를 더한 비극에 처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일은 일어났고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며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앞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것이 다만 정확한 사실의 획득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건의 복판에 놓인 이의 마음, 그와 그의 비극을 대하는 이의 마음 그리고 그 두 마음 사이의 거리와 온도는 어떤 순간이 지나면 영영 느낄 수 없게 된다. 사실에 파묻힌 마음의 진실들을 모른 채로 살아간다면 그 순간의 해결 혹은 해갈은 영원히 공백으로 남을 테니 말이다. 정해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언니 유정]은 아찔한 비극을 소재로 한다. 미성년자의 영아 유기 사건이 그것이다.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이 충격적인 사건은 이내 한 가족과 학교를 큰 혼란에 빠트린다. 누가 도대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인가. 기정(이하은)은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백하고 이제부터는 기정이 왜 이런 일을 학교에서 저질렀는지에 초점이 맞춰 수사가 진행된다. 기정과 단 둘이 사는 언니 유정(박예영)은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고등학생인 동생 기정과 간호사인 언니 유정에게는 매일 시차가 있어 둘은 마주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유정은 기정을 위해 매일 집 현관문에 용돈을 붙여 두고 동생의 하루를 챙기는 언니지만 당연하게도 기정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유정은 기정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정말 네가 그런 게 맞니?" 이 사건이 벌어진 후에야 유정은 기정의 곁에 단짝 친구 희진(김이경)이 있었음을, 그가 어떤 사실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희진을 통해 기정의 사실로 다가서려 하지만 희진은 유정이 건넨, 기정이 좋아했다던 마카롱을 보며 말한다. '기정이는 단 거 안 좋아해요.' 그제서야 유정은 누구보다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던 기정이 자신과 얼마나 멀리 떨어진 채로 살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내가 알던 기정은 과연 누구였을까. 언니 유정의 마음이 길을 잃는 지점에서 영화는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다. [언니 유정]은 미스터리 드라마의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무척 더디게 발걸음을 옮기는 영화다. 영화는 누가 범인인지 왜 그 일을 저질렀는지를 밝히는 것을 최대한 유예한다. 그 과정에서 기정과 희진, 유정까지 세 사람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삶을 살게 되지만 누구보다 세차게 요동치고 수없이 흔들리는 이는 언니 유정이다. 언니 유정으로, 간호사 유정으로 동시에 살아가는 그의 삶은 반복적이다. 환자를 돌보는 일은 익숙해지더라도 친숙해지기 어려운 종류의 일일 수 밖에 없고 부모님 없이 하나뿐인 동생을 돌보는 일 또한 녹록하지가 않다. 마음도 시간도 여유도 충분히 쓸 수 없는 상태로 유정을 그렇게 매일을 산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성적도 우수하고 딱히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기정이 기특하지만 눈을 마주치고 머리를 쓰다듬을 틈을 만들지 못한 유정은 그저 자신의 노동으로 얻은 가치를 기정에서 묵묵히 쓴다. 이 마음이 기정에게 닿으리라는 믿음을 마음 한 켠에 묻어둔 채로.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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