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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일보] 장롱과 벽 사이 오래된 캐리어 하나 쭈그리고 앉아 있어요 일부러 닦아내지 않은 캐리어 위 먼지들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는 당신처럼 아무 생각이 없어 보여요 한때 쌩쌩한 바퀴 굴리며 누군가의 여행과 함께 했을 캐리어 가슴 속에 의미 있는 자국을 새기기에 충분했을 시간을 생각해 봐요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서로의 가슴 속에 바큇자국을 남기며 지나가는 낯선 바람일지 몰라요 당신이 지어준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당신이 낯설어요 몇 개의 이빨이 빠져 끝까지 닫히지 않는 고장 난 지퍼 사이로 누렇게 빛바랜 양말 한 짝 반쯤 걸려 있고요 어디로 향하던 발이었을까요 * 「쓸쓸한 전성기」 부분 ![]() 삽화=배수연 어쩌면 당신 앞에서 캐리어를 만나지 않았을 때가 나의 가장 예뻤던 시절이었을지 모른다. 길거리에서 캐리어를 끌어야 하는 삶은 시간과 싸우며 울었고, 길은 끝없이 흘러 여기에 이르렀다. 캐리어는 고장 난 채 장롱과 벽 사이에 끼어 불편한 시선으로 나를 보며, 그 시선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는 당신을 서로의 가슴에 남긴 "바큇자국"으로 보관한다. 캐리어와 당신은 이음동의어이며 심지어 이젠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런 당신을 내치지 못하는 것은 캐리어 안에 목쉰 노래와 묵은 발자국들이 빛바랜 양말 짝처럼 때로 비집고 나오기 때문이다. "고장난 지퍼"가 훤히 꿰고 있는 당신에 관한 기억들을 더욱 고정시키지만, 살다 보면 왠지 당신이 낯설고 오랜 사랑이 낯설다. 당신이 너무 많이 남아 있나? 우리는 향하던 곳에서 이내 멈추고 내가 타고 온 버스가 어느 길모퉁이를 내려가는 것을 보며 시간이 할애해 주는 마지막 혼밥을 먹는 것일 뿐.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랑이여. 쓸쓸함의 전성기엔 뭐가 있나. "당신이 지어준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당신"이 있다. <시인>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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