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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일보] 포근한 느낌이 감도는 마을이다. 북쪽에 고내봉이 하늬바람을 막아줘서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정주공간이 들어선 지역 남쪽 또한 경사가 높은 언덕들이며 동산이 있어서 이곳에 정착해 설촌했던 최초의 조상들은 풍수지리에 밝은 분들이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설촌 초기부터 '더럭'이라 불러왔다. 인근 마을들의 옛 명칭들이 한문이 아니라 우리말로 부른 것을 보면 보편적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태종16년(1416)에 제주를 3읍으로 나눴는데, 이 당시에 일부 큰 마을들을 분촌하는 경우가 있었다. 1418년 고내현을 고내촌과 가락촌으로 나뉘었다. 이후 세종 30년에는 마을 자체에서 웃더럭(上加樂村) 알더럭(下加樂村)으로 구분해 부르기 시작했다. 연원에 대해 다양한 해석과 전해 내려오는 설이 있지만 대부분 추측뿐인 한자로 표기된 加樂. 뜻이 참으로 정겹다. '즐거움이 더해지는 곳'. 조선시대 이 명칭은 관아에서 문서용으로 주로 사용했고 마을 주민들이나 주변마을 사람들은 '더럭'이라는 이름이 통용됐다. 웃더럭이라고 하는 마을 명칭이 흘러온 경로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유서 깊은 마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회관 남쪽 동산 아래 다른 마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시비가 있다. 상가리라고 하는 한 시를 거대한 돌에 새겨서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마을공동체의 의지라는 것이다. 한글로 해석한 내용을 옮기면 '한라산의 정기가 선비고을에 서리니 / 경관 좋은 가락촌에 상서로운 빛 엉기네 / 서학당에서는 세상의 도리 전했고 / 하운암에서는 시 문장을 즐겼다네 / 노을 드리운 저녁 바다에 그림 속 경치 열리고 / 바람 스치는 가을 들에서는 귤향기 보내 오내 / 길한 땅이라 인재가 연이어 배출되니 / 모든 집의 후예들 모두 번창하리라'. 단순하게 어떤 염원을 돌에 새긴 것이 아니라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강력한 표출이며 그 정체성을 이어가겠다는 각오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합의를 천명하는 내용으로 읽힌다. 어찌하여 양반고을 선비마을이라고 주변마을 사람들 또한 지칭하며 살아왔는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선비정신으로 인격도야에 힘써서 세상을 위한 인재를 배출하는 것. 이 마을에서 태어나 한 명의 인재가 출세하기 위해서는 마을공동체라는 사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어른들은 어떤 모범과 본보기를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다짐하는 시문이다. 조상들이 그렇게 살아왔기에 세상을 위해 일하는 인재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것을 각 집안마다 내력담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공감대가 형성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예의(禮義)와 염치(廉恥)라고 하는 두 개의 덕목이 깊이 뿌리내려 천년 고목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마을 상가리다. ![]() 양철승 이장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에는 어떤 난관이 있어도 극복하고 돌파할 자신감 충만한 마을이지만 자연이 알아서 해줘야 하는 일에는 난감한 고충이 있었다. 농업용수 문제였다. 관정의 숫자도 모자란 형편이지만 농한기에 받아놓을 농업용수를 저장할 시설이 부족해 고충을 토로하는 주민들이 많다는 것. 농민이 농사지을 물이 부족해 농작물이 말라죽는 것을 보는 심정은 지옥이 따로 없는 것이라고 했다. 심층적인 조사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행정적 노력이 있어야 함에도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상황이 발생됐는지 점검하고 조사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화려한 비전을 제시하는 행정당국에게 상가리 농업용수 문제는 양반고을 스타일로 치산치수(治山治水)가 근본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다. <시각예술가> 동산을 오르는 길에서 <수채화 79㎝×35㎝> ![]() 산과 이웃하여 <수채화 79㎝×35㎝> ![]()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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