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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일보] 정원에서 한 여자가 혼자 있는 사이, 두 사람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거짓을 꾸민다. 여자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재판정에 선다. 증인은 둘이고, 진술은 일치한다. 이야기는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의 말은 사실이 되고, 한 사람의 침묵은 잘못이 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성경 다니엘서에 나오는 '수산나와 두 노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 일이 어느 나무 아래에서 일어났는가." 젊은 예언자 다니엘의 질문은 짧다. 그러나 이 짧은 질문이 이야기의 방향을 바꾼다. 사람들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무엇이 있었는지, 누가 무엇을 보았는지. 그때 질문이 들어온다. 사람이 아니라 장면을 향해.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시선이 미처 닿지 못했던, 아주 구체적이고 사소한 공간의 틈새를 짚어낸 것이다. 우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곧바로 이유를 묻는다. 왜 그 자리에 있었는가, 왜 혼자였는가, 왜 더 크게 말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사실을 밝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이미 기울어진 방향을 확인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누구를 먼저 의심할 것인가가 무엇을 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누구를 의심할 것인가가 먼저 정해지는 순간 상황은 제대로 직면되지 못하고 진실은 쉽게 가려진다. 하나의 선입견이 거대한 권력이 되어 한 인간을 지목할 때, 개인이 가진 진실의 목소리는 너무나 무력하게 묻히고 만다. 다니엘은 두 사람을 따로 세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느 나무 아래였는가. 한 사람은 느릅나무라 했고 다른 사람은 참나무라 말했다. 이야기는 그 사소한 차이에서 흔들린다. 거짓은 대개 큰 주장보다 작은 어긋남 속에서 드러난다. 그는 도덕적 판단을 앞세우지 않고 말의 차이를 통해 진실이 드러나는 자리를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누가 잘못했는가를 먼저 묻기보다 무엇이 손상되었고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를 묻는 방식이 있다. 기존의 사법적 잣대가 오직 '죄와 벌'의 저울질에만 몰두한다면, 이 새로운 방식은 깨어진 공동체의 관계와 깊은 상처를 먼저 응시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서로의 말이 다시 만날 수 있는 조건이다. 책임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재판은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다니엘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묻고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이 사람을 향하는지 장면을 향하는지에 따라 세계는 달라진다. 질문은 당사자가 놓인 상황을 드러내고 상대가 마주해야 할 고통을 비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책임은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의 응답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타인의 아픔에 응답하려는 자발적인 마음이 고개를 들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회복의 문턱에 들어서게 된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정직한 응답만이 서로를 치유하는 시작이 된다. 어느 나무 아래에서였는가. 지금 우리는 무엇을 묻고 있는가. <한상희 서귀포중학교 교장·교육학 박사>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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