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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觀/ 파리의 사생활] 서로의 통로
진명현 hl@ihalla.com 기자
입력 : 2026. 08.10. 02:00:00

영화 '파리의 사생활'.

[한라일보] 일을 오래하면 베테랑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 한 가지 업으로 경력을 오래 쌓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세월의 힘을, 자신이 간직해 온 루틴의 힘을 믿기 마련이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든 동력이기에 습관의 힘을 믿는 일은 불안과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 자신을 믿는 일이기도 하다. 나를 믿지 않으면 세상을 의심하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게 나를 믿다 보면 한편으로는 내가 쌓은 벽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성실하게 쌓아 올려 안전하게 구축된 나의 영토에 세월만큼 두텁고 높아진 벽이 있음을 보지 못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 그 안의 나는 나의 소리만을 듣기 마련이다. 나라는 의미로만 가득한 메아리가 나를 위로하고 시시각각의 불안을 다독인다. 갇힌 채로 안전한 모순 속에서 나의 균열과 부식을 눈치 채기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릴리안(조디 포스터)은 베테랑 정신과 의시다. 안락하고 독립적인 공간에서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각기 다른 고충을 털어 놓는 이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말을 더하는 일이 그녀의 주요한 일상이다. 환자의 사생활을 여지없이 들어야 하는 릴리안은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는 이고 그래서 그들의 말들을 녹음이라는 기능을 통해 보존하고 관리하며 지켜야 하는 직업인이다. 어느 날 릴리안의 환자 중 9년 동안이나 그녀의 상담을 받아왔던 폴라(비르지니 에피라)가 돌연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폴라의 남편은 릴리안이 폴라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며 폭언을 퍼붓고 릴리안은 자살이라는 폴라의 사인이 영 석연치가 않다. 그리고 그 즈음 릴리안의 눈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리기 시작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타인의 죽음과 자신의 눈물 속에서 릴리안의 또렷하고 안온했던 일상은 흐리고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는다.

릴리안은 이혼 후 가족에게 곁을 내주지 않은 채로 삶을 이어오던 사람이었다. 전남편과는 친구처럼 지내지만 동반자로서의 관계는 정리한 지 오래고 아들과 손자에게는 무심한 엄마이자 할머니이다. 좀처럼 틈을 내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릴리안은 스스로를 믿지 않으면 삶의 동선을 걸을 수 없게 자체 설계된 사람이다. 수많은 환자를 대하고 그 환자들과의 유대에도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있던 릴리안에게 찾아온 폴라의 죽음은 견고하게 유지되던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린다. 폴라가 릴리안이 유독 애착을 갖고 있던 인물이어서 만은 아니다. 내 삶이 잘못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폴라의 죽음과 함께 릴리안을 덮쳐온 것이다. 걸음과 심장 박동이 함께 빨라지면서 릴리안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음을 알게 된다. 흐르는 눈물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안과 의사인 전남편을 찾아가야 하고 죽음의 원인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최면술사의 능력을 빌려야 한다. 모르는 것들이 다가왔을 때 내 안전한 영토는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투명한 벽들을 인지하고 내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야 함을 릴리안을 그제서야 알게 된다.

<파리의 사생활>은 장르적으로는 미스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장 영화의 행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유를 찾기 위한 수사의 과정은 결국 나의 지금을 되돌아 보는 삶의 여정이 된다. 해결된 것들과 해결되지 않은 것들 사이에는 과거의 나로 만들어져 현재를 살고 있는 내가 있음을 릴리안은 알게 된다. 그리고 현재는 가늠할 수 없을 미래에 과거라는 기댈 영토가 되어줄 것임을, 그 영토는 늘 안전과 위험 사이에서 나와 세상 사이에서 매번 새롭게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투명하고 안전한 벽에 문을 내고 밖을 향해 스스로를 꺼낸 릴리안은 마침내 새로운 자신으로 환자 앞에 설 수 있게 된다. 언제나 녹음에 의존하던 릴리안이 녹음 대신 듣는 일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릴리안의 벽에는 타인의 마음이 들어올 수 있는 충분한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 안으로는 나의 불안을 잠재워 줄 다른 빛이 들어올 것이고 나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새로운 바람이 들고 날 것이다. 어쩌면 내 소리 또한 타인에게 가 닿아 해결의 실마리를 함께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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