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찬미의 한라칼럼] 종이신문을 왜 읽는가?

[고찬미의 한라칼럼] 종이신문을 왜 읽는가?
  • 입력 : 2019. 01.15(화) 00:00
  • 김경섭 수습기자 kks@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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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신문은 이제 구시대 유물이 되어버린 걸까? 최근 신문 구독으로 인해 필자는 한바탕 소동을 겪은 적이 있다. 새벽 신문배달이 경비 근무자의 쪽잠을 깨우게 되어, 새로 이사한 곳 관리실로부터 요새도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이 있냐는 핀잔을 듣게 됐다. 이제까지 신문 구독자가 단 한 명도 없던 건물에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 것이었다. 다행히 경비 근무자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 신문을 계속 받기는 하지만,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이 유별나게 취급받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 씁쓸하기만 하다.

이제는 다양한 매체가 존재하기에 과거처럼 신문만을 주된 뉴스미디어라 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휴대폰만 꺼내면 인터넷 뉴스와 유튜브, 팟캐스트 소식 등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할 수 있는 세상이다. 게다가 이를 무료로 볼 수 있는데, 굳이 돈을 들여 전날 인쇄되어 시의성마저 떨어진 신문을 구독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나올 만도 하다. 종이 활자로 뉴스를 보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밴 사람이 아니라면, 신문을 보는 사람은 왠지 특별한 구독 사연이 있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가만 보니, 필자도 신문을 보는 데 그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최근 들어 뉴스의 진위 구별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 1인 미디어를 포함하여 뉴스를 만들고 전달하는 매체가 많아지면서 다행히 뉴스 생산의 독점은 깨지고 있지만, 사실관계에 근거하지 않는 가짜뉴스가 더 확산되어 버리고 있다. 심지어 엄정하고 공정한 뉴스보다 믿고 싶은 대로 만들어진 가짜뉴스가 더 각광받으며 여론형성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이에 경각심을 가져도 부족할 텐데, 알고리즘을 적용한 첨단 정보기술은 오히려 내가 듣고 싶은 세상 소식만 골라줘서 문제를 더 키우고 있다. 스마트 기기들은 평소 검색 키워드나 공감글 분석을 바탕으로 이용자의 취향과 관심에 딱 맞는 소식들을 매일매일 눈앞에 펼쳐준다. 매우 편리하나 자칫 잘못하면 바깥세상이 내가 원하는 세상처럼 보인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생각한다는 잘못된 믿음에 갇혀 실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 큰 충격을 받고 좀처럼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해지고 있다. 우리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역설적으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신문이 절대적 사실과 가치만을 전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문도 발행처의 이해관계나 진영논리에 의해 오히려 편향된 시각으로 뉴스를 편집하고 전달하기도 하며, 더군다나 그런 시각차가 신문의 정체성을 결정해 나간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 신문의 입장차를 인지한 후 그 신문의 기사를 읽게 되므로 자연스레 거리를 둬 비판적 견지를 유지할 가능성이 생긴다. 적어도 내가 보려는 것만 보지 않게는 된다. 그리고 신문지를 넘기다보면 전혀 내 관심사가 아닌 특집 기사나 칼럼, 한 귀퉁이 소소한 이웃 소식까지도 우연히 접하게 된다. 마치 우회하며 세상을 둘러봐야 하는 완행열차를 탄 것과 같지만, 잠깐은 속도를 늦춘 덕분에 이전에 못 보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면서 내가 사는 세상이 참 넓기도 한 것을 다시 깨닫는다. 좀 더 폭넓고 균형 잡힌 시각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같은 것을 보아도 각양각색 반응을 내놓는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하루하루 학습해나갈 수 있는 신문을 펼치며 오늘 하루도 시작한다.

<고찬미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위원·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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