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조작' 무죄 선고 앞두고 유명 달리한 김태주 할아버지

'간첩 조작' 무죄 선고 앞두고 유명 달리한 김태주 할아버지
1968년 '만년필 간첩 조작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
지난 18일 판결 났지만 심장마비로 이미 세상 떠난 뒤
유족들은 기쁨보다 슬픔… "판결문 들고 묘소 찾을 것"
  • 입력 : 2019. 01.20(일) 16:55
  • 송은범기자 seb1119@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생전의 김태주 할아버지. 사진=유족 제공

"지난해 12월 30일에 사망했다고요? 가족 분들은 나오셨나요? 그럼 형사소송법 제438조에 따라서 피고인의 출석없이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피고인 김태주 무죄."

 무죄 판결을 불과 19일 앞두고 세상을 떠난 80대 할아버지의 사연이 세상에 알려져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51년 전인 1968년 '만년필 간첩 조작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故 김태주(80)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지난 18일 제주지방법원 형사2단독 황미정 판사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51년 전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김 할아버지의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김 할아버지는 제주시 도련1동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줄곧 농사만 지었던 순박한 청년이었다. 당시 마을의 '농사개량구락부' 회장을 맡아 감귤 묘목을 자체 생산·식재하는 등 북제주에서는 가장 먼저 감귤 농사를 성공시켰다.

 이러한 공로로 김 할아버지는 28살이 되던 1967년 4월 제주에서 10명을 뽑는 '농업과수 연수생'으로 선발돼 일본 후쿠오카현 구루메시 감귤 농가에서 3개월간 농업 연수를 받았다. 연수를 마친 뒤에는 오사카 소재 친척집에서 일주일간 머물다 제주로 돌아왔다.

 

김태주 할아버지가 만년필 간첩 조작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던 모습. 사진=유족 제공

문제는 제주에 돌아오기 전 오사카 조선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친척에게 받은 만년필 3자루 때문에 발생했다. 만년필에 북한이 추진했던 사회운동의 명칭인 '천리마'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1968년 4월 1일 제주경찰서 정보과 경찰관에게 연행된 김 할아버지는 10여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허위 자백과 진술서가 작성됐고, 일본 체류 당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오사카 지도원이었던 또 다른 친척으로부터 중고 양복 1벌을 받은 혐의도 추가됐다.

 결국 같은해 7월 31일 제주지방법원은 '북괴가 소위 천리마운동의 성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제작한 선전용 만년필과 조총련 지도원에게 양복을 수수한 혐의'로 김 할아버지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이후 김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연수를 받을 때 단벌로 갔기 때문에 지저분한 모습을 본 친척이 자기가 입던 양복을 하나 준 것 뿐이고, 만년필도 마음적으로 선물을 한 것일 뿐인데 그것을 반공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억울하다"며 항소를 제기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재심 선고공판에서 황미정 판사는 "피고인이 일본에 체류할 당시 친척에게 만년필과 중고 양복을 받은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만년필과 중고 양복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반국가단체(조총련)의 지령을 받거나, 그 사정을 알고 물품을 받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사실상 조작된 사건이라고 판단했다.

 무죄 선고 직후 김 할아버지의 유족들은 기쁨보다는 이 소식을 전할 주인공이 없다는 사실에 슬퍼했다. 선고 19일을 앞두고 정정했던 김 할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김 할아버지의 큰딸 김미경씨는 "아버지는 감옥에서 모친이 돌아가신 소식을 접했다는 것에 대해 가장 억울해 하셨다. 생전에도 술을 드시면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를 항상 부르셨다"며 "검찰에서 항소를 하지 않고 선고가 확정되면 판결문을 들고 아버지 묘소에 찾아 뵐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재판을 맡은 이명춘 변호사는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지만 당시 고문을 받았던 사실이 적시되지 않아 아쉽다"며 "향후 김 할아버지가 억울하게 구금됐던 시간을 보상하는 '형사보상'과 더불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9641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