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 (1)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 (1)
  • 입력 : 2019. 03.01(금) 0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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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강준 소설가의 장편 '갈바람 광시곡'을 연재합니다. 세 젊은이의 3대에 걸친 인연을 중심으로 제주의 역사와 문화, 중국 자본의 안팎을 좇는 소설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를 바랍니다. …○

강준 작/고재만 그림




인간이 카이로스를 붙잡았을 때
안락과 행운이 따르지만 거기엔 욕망도 꿈틀댄다


만약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배터리처럼 똑같은 시간이 주어졌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좀 더 혼란스럽고 각박해졌을까 아니면 안정되고 인정이 넘쳤을까? 그러나 인간은 불행스럽게도 자신에게 주어진 생존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제우스가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죽임으로써 올림포스의 신들은 불멸의 시간을 살게 되었지만 인간에겐 시간의 지배를 받아 늙고 죽게 되는 운명의 족쇄가 채워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제우스의 아들 카이로스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시간을 상대적으로 늘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이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아무나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카이로스의 모습에서 기회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앞과 옆머리는 길어서 쉽게 알아볼 수 없고 알아 본 자만이 붙잡을 수 있지만, 뒷머리는 대머리여서 지나고 나면 붙잡지 못한다.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고 양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기회가 왔을 때 재빨리 판단해서 결단하라는 의미다.

인간이 카이로스를 붙잡았을 때 안락과 행운이 따르지만 거기엔 욕망도 꿈틀댄다.

고재만 화백



창문으로 스며든 교교한 달빛마저 잔망스러웠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으나 왕치관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름이 지났는데도 푹푹 찌던 습기 많은 공기는 한밤이 되어서도 사그라들지 않고 금방 샤워한 몸을 데웠다. 밤 깊은 시간인데도 거리의 부산스러운 사람들의 발걸음과 수런거리는 말소리가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붕대 감은 팔마저 욱신거렸다. 오늘따라 예약하지 않은 손님들이 갑자기 몰려드는 바람에 정신줄 놓고 웍을 놀리다가 기름이 튀는 바람에 생채기가 났다.

비몽사몽간에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는 링링이 분명했다.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치관은 황급히 바지를 꿰고 밖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링링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숨이 거칠었다. 그녀는 문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치관의 손을 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치관 큰 일 났어. 우리 여길 떠나야 돼. 그것도 날이 밝기 전 당장."

"아니 무슨 일인데?"

"공산당 군대가 몰려오고 있대. 가만히 앉아 개죽음 당할 순 없잖아? 우린 이미 피난 준비를 끝냈어. 넌 어떻게 할 거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치관은 갑자기 가슴이 뛰며 머릿속이 환하게 비어감을 느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이 득세해 대륙의 넓은 지역을 접수해나면서 국민당원들을 숙청해나가자 장제스(蔣介石)를 비롯한 국민당 간부들과 추종세력들은 본토에서 떨어진 큰 섬 타이완(臺灣)으로 본부를 옮겼다는 것을 왕치관도 소문 들어 알고 있었다.

링링의 아버지 양수이핑 씨는 국민당 요녕성(遼寧省) 간부였다. 강하(康河)에 살면서 열 척의 화물선을 운영하는 갑부였다. 그런 부르조아를 공산당원들이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미리부터 타이완으로 건너갈 계획을 세우고 재산을 정리하고 있다는 걸 링링에게 들었었다.



부친은 들고 온 도마칼과 웍을 내밀었다.
평생 뜨거운 불 옆에서 쇠를 다루어온 아버지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같이 안 갈 거야?"

생각에 골몰해 있는 치관을 보며 링링이 물었다.

"아버님께 말씀 드렸더니 막무가내야. 그 연세에 어디 가서 무슨 영화 누리겠다고 고향을 뜨냐고..."

"그럼 우린 이게 마지막이야?"

금세 링링의 눈가엔 그렁그렁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부터 한 동네에서 자라면서 쌓아온 우정은 사랑으로 변했고 결혼까지 약속한 링링이었다. 링링의 아버지는 부잣집 사위를 염두에 두고 치관을 무시했지만 링링의 마음은 치관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 링링을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노쇠한 아버지와 병든 어머니, 어린 동생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치관은 링링을 껴안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어디 가서든 잘 살아. 운이 좋으면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차라리 내가 남을까?"

"아니야. 공산당 패거리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난 링링을 지킬 힘이 없어."

링링이 치관을 밀치며 떨어져 나갔다.

"우린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기로 맹세했잖아?"

"링링, 그건 맞는 말이지만 지금 형편으론 같이 갈 수 없어."

"그럼 뱃속의 아이는 어떻게 할 건데?"

갑자기 치관은 머리카락이 곧추 서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 지금 그 말... 임신한 거야?"

"그래. 아빠한테도 말했어. 함께 가도록 허락도 받았단 말이야."

"이걸 어쩌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어디 건 살아만 있어. 내 꼭 찾아갈게."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나 혼자 어떻게 하라고? 난 몰라."

링링은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 된 얼굴을 치관의 가슴에 묻고 떨며 울었다. 치관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링링의 등만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렇게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데 뒷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둘이 놀라며 떨어져 섰다. 치관의 아버지였다. 링링은 부친을 보자 인사도 없이 '난 몰라'를 연발하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치관이 따라가지 못하고 뻘쭘한 자세로 서 있을 때 아버지가 식탁 의자를 빼내 앉으며 무거운 분위기를 깼다.

"네 애기 듣고 많이 생각했다. 창창한 네 앞길을 막는 게 애비의 도리가 아니라는 게 결론이다. 어서 짐을 챙기고 따라 가거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치관은 귀를 의심했다.

"예? 우리 식구들은 어쩌구요?"

"너도 이제 독립해야지. 우린 걱정 마라, 동생 있잖니. 치영이가 내년이면 졸업이니 그놈이 식구들 밥 굶기진 않을 거다. 링링 같은 애를 어디서 만나겠니. 눈에서 멀어지면 끝이야."

그러면서 부친은 안으로 들어갔다. 치관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기어코 눈물 두 줄기가 떨어졌다. 사내는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지만 장남으로서 가족과의 생이별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부친이 두 손에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

"남자 자식이 그렇게 함부로 눈물 흘리는 거 아니라고 했지?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고향을 지키고 있을 테니 세상 좋아지면 찾아오너라."

그러면서 들고 온 도마 칼과 웍을 내밀었다.

"자 이거 가지고 가거라.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어디 간들 네 실력이면...."

평생 뜨거운 불 옆에서 쇠를 다루어온 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게 분명했다. 치관의 얼굴에선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내미는 물건을 받아들며 슬쩍 훔쳐본 아버지는 무덤덤한 척 했으나 검은 얼굴이 불그죽죽한 것으로 보아 울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서 짐을 챙겨라. 어머닌 자고 있으니 깨우지 말고 가거라. 나중에 내가 알아듣도록 얘기하마."

"아버지. 고맙습니다."

치관은 아버지를 와락 껴안았다. 품에 와 닿는 앙상한 뼈마디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렸다. 부친이 살며시 몸을 뺐다.

"어서 가거라."

치관이 안으로 들어가자 부친은 기어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쓰윽 훔치며 걸음을 옮겼다.

행장을 꾸리고 밖으로 나오는데 물끄러미 치관을 바라보는 검은 물체를 발견했다. 치관은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약력] 강준 작가

▷본명 강용준
▷제주 애월 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동 교육대학원 졸업
▷1987년 월간문학 신인상 등단
▷장편소설 '붓다, 유혹하다', '사우다드', 희곡집 5권
▷삼성문학상, 한국희곡문학상, 제주문학상, 한국소설작가상 등 수상









[약력] 고재만 화백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졸업
▷국민대학교교육대학원 교육학과 (미술교육 전공) 졸업 (교육학석사)
▷1978년 9월∼2007년 8월 중·고등학교 미술교사 역임
▷미술교육가, 화가, 한국미술협회제주지회원, 제주미술대상전 초대작가(서양화). (사)제주어보전회 회원(제주어 교육팀), 그린샌드아트연구회 대표(샌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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