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7)천하-하늘 아래 모든 것

[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7)천하-하늘 아래 모든 것
"지리적 고립·방대함·문화적 영향 중국 중심 천하관"
  • 입력 : 2019. 05.02(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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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 한글이 창제된 후 한자와 한글은 어색한 동거를 시작했다. 뜻글자인 한자는 글자마다 제각기 고유한 의미를 지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복합글자가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비슷한 글자끼리 만나 명사가 될 때는 문제가 없지만 결혼結婚, 졸업卒業 등 동사와 명사가 함께 쓰이는 이른바 이합사離合詞의 경우 이미 동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명사에 동사가 들어가야 말이 되는 한글과 만나면 동어반복을 벗어날 길이 없다. 동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역전驛前앞'의 경우는 또 다른 문제이다. 또한 문자란 한 나라의 고유한 문화전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중일이 한자를 공유하고 있기는 하나 때로 같은 의미에 다른 글자를 사용하거나(비상구非常口-일본, 태평문太平門-중국), 각기 다른 글자를 창조하기도 했다(돌乭-한국, 전비前扉(まえとびら)-일본).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천하天下와 국가國家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인은 유별나게 천하라는 말을 좋아한다. 천하제일, 천하흥망, 치국평천하, 천하일통天下一統, 주유천하 등등. 천하는 글자 그대로 하늘 아래라는 뜻이다. '삼국연의'를 읽어본 이들은 '천하삼분天下三分'이란 말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서 천하는 정확하게 위촉오魏蜀吳 세 나라의 영역일 뿐이다. 그럼에도 하늘 아래 모든 지역을 뜻하는 천하라고 쓴다. 왜 그런 것일까? '시경''북산北山'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늘 아래 온 세상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강과 바다에 접한 모든 세상에 왕의 신하가 아닌 이가 없다(普(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왕은 하늘 아래 모든 땅의 소유자이자 모든 사람의 지배자라는 뜻이다. 적어도 주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과연 그러한가? 지금 우리에게 천하는 천지나 육합六合, 환우와 유사한 말로 세계의 뜻으로 쓰인다. 그렇다면 한 때 중국이 전 세계를 지배했다는 뜻인가?



고대인들 구주를 천하로 여겨
천원지방 관념서 천하관 태동
비단길 열려도 관념 요지부동


문제는 과연 당시 그들이 생각하는 천하가 무엇이냐는 데에 있다. 아직 세계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 고대 사람들이 생각하던 천하는 구주九州였다. 구주는 기주冀州(하북), 연주(산동), 청주靑州(강소), 서주徐州(호북), 양주揚州(호남), 형주荊州(하남), 예주豫州(사천), 양주梁州(섬서), 옹주雍洲(산서)를 말한다. '상서' '우공禹貢'에 나오는데, 우 임금이 치수에 관심을 두었던 곳이라 하여 우역禹域이라고 부른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의 산해도.

이외에도 오복五服이 있다. 오복은 임금이 자리한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하여 왕기王畿(도성 인근의 토지)를 에워싸고 있는 토지를 각기 500리씩 네모반듯하게 구획지은 것으로 전복甸服, 후복侯服, 수복綏服, 요복要服, 황복荒服을 말한다. 예를 들어 맨 꼬라비에 있는 황복은 도성에서 2000리부터 시작하여 2500리까지 지역을 말하는데, 주로 융적戎狄 등 오랑캐가 사는 곳이다. '주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구복九服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복'은 섬긴다는 뜻이며, 거리의 원근은 친소親疏의 구분에 따랐다. 이외에 상복도 친소에 따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오복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천하관은 근본적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관념에서 나왔다. 둥근 하늘에 움직이지 않는 정점은 북극성이고, 땅은 네모지니 당연히 그 중앙에 임금이 있지 않겠는가? 이렇듯 구주이든 구복이든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하는 그들이 지배하는 모든 지역, 즉 중국中國(서주西周 경기 지역), 중원中原이자 세상 전체였던 것이다. 물론 이를 의심한 이들도 있었다.

▲남경박물관 소장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대표적인 인물은 추연鄒衍이다. 그는 구주나 구복 등 유가에서 말하는 중국은 적현신주赤縣神州로 진짜 천하의 81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세상에는 적현신주와 같은 것이 9개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대구주이고, 바다로 둘러싸인 대구주 밖에 여덟 개의 대구주가 또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전체 세계라고 했다. '산해경山海經'은 이보다 더한 신화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책은 구주의 인간들과 전혀 다른 괴이하고 흉측한 형태의 괴물이나 특이한 산물이 생산되는 지역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양자 모두 천원지방이라는 관념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인들도 자신들의 세상 밖으로 나가고 또한 세상 밖의 사람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한나라 무제의 명을 받은 장건張騫은 사신으로 서역西域에 나갔다가 대원大宛(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분지), 강거康居(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남부), 대월지大月氏(파미르고원 서쪽), 대하大夏(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에 접해 있는 박트리아), 오손烏孫(천산 산맥 북쪽), 안식安息(이란), 신독身毒(인도) 등 여러 나라를 다녀왔다. 비단길의 시작이다. 당대에는 일본과 조선의 사절들이 쉼 없이 오고갔다.

구주도. 세계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 고대 사람들이 생각하던 천하는 구주였다.

명대 영락제의 명을 받은 정화鄭和는 전체 일곱 차례나 바다로 나아가 인도양을 거쳐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와 아라비아 반도 남쪽 아덴은 물론이고 아프리카까지 항해했다. 더군다나 이른바 서융西戎(서쪽 오랑캐)이라고 부르는 서역의 먼 나라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어 중국의 종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의 천하관은 그들의 뇌리 깊은 곳에 박혀 요지부동 변하지 않았다.



방대한 대륙 자체서 자급자족
"영국 물건은 필요한 것 없어"
아편전쟁 그들만의 세계관 균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중국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나라이다. 동쪽과 남쪽은 바다, 서쪽은 산과 사막으로 막혀 있다. 유일하게 통할 수 있는 북쪽은 스스로 만리장성을 쌓았다. 사방이 막혀 있으니 인식이나 관념 또한 막힐 수밖에 없다. 물론 나갈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천산산맥 남쪽과 북쪽, 그리고 동해와 남해 쪽으로 육로와 해로의 비단길이 뚫려 있다. 만리장성 역시 동쪽 산해관山海關에서 서쪽 가욕관까지 대표적인 13관을 비롯하여 수십 개의 관문이 자리하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을 나서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이렇듯 고립되었으나 중국은 자체로 방대한 대륙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자체로 능히 자급자족할 수 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1792년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매카트니 훈작을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건륭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토록 했다. 영국인의 거주와 상업 및 무역, 개항을 위한 조약 체결이 목적이었다. 건륭제는 이렇게 답했다.

1792년 영국 매카트니 훈작이 건륭제를 알현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천조天朝는 멀리까지 덕망과 위업이 전해져 만국의 왕이 온갖 귀중한 물건을 보내와 없는 것이 없도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진귀한 것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영국의 물건은 필요한 것이 없도다.……영국 국왕은 짐의 뜻을 깨닫고, 더욱 면려하고 정성을 다하여 영원히 공순함을 잃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보전하고 태평의 복락을 향유하기를 바라노라."

셋째, 중국인들에게 천하관은 국가의 경계로서 지리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 공간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천하의 중심에 있다는 중국인들의 천하관이 바로 그들의 세계관이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부심과 오만감에 결정적인 충격을 준 것은 명대 만력제 시절 이탈리아에서 온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산해여지도山海輿地圖'였다. 중국에서 인쇄한 최초의 서양식 세계지도였다. 하지만 만력제는 그 지도가 의미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오히려 이를 근거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라는 병풍을 제작토록 했다. 천조는 천하의 중심에 있다는 그들만의 세계관은 1840년 아편 전쟁이 발발한 후에야 비로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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