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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장편 연재/갈바람 광시곡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4)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19. 05.30. 2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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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6-1. 대륙에서의 며칠



위급한 상황을 닥쳐보면 사람들의 성향과 인간성이 드러난다. 누구는 피하고 누구는 체념하며 포기하고 누구는 맞서 이겨 낸다.

화재 이후 왕강룡 씨는 모진 고통을 인내해야 했다. 모친을 화재로 잃은 후 영업장에 살림방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살림집을 따로 얻어서 인명 피해는 면했다. 그러나 재산상 피해보다도 정신적 충격이 매우 컸다.

삽화=고재만 화백

부인은 화교협회 부녀자들의 도움을 받아 며칠을 쾌쾌한 냄새 속에서 쓸 수 있는 식기나 조리 도구를 골라내어 씻어 내고 정리했다.

불난 집은 장사가 잘된다는 주변의 위로는 큰 위안이 되었으나 새롭게 단장하여 영업을 재개하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마작이라도 배워두었으면 화교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을 텐데. 왕 사장은 음식 조리 말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서글펐다. 주말이면 다니던 경마장도 한 푼이 아쉽기도 했지만 부질없이 생각됐다.



그의 힘은 대단했다. 말로는 독려고 권유한 것이지만, 실세의 말을 거역하면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몰라 많은 이들이 외상값을 통장으로 송금해 왔다
왕 사장은 권력의 위력에 감탄했다




열심히 부어왔던 화재 보험금에 화교들의 위로금이 있었으나 리모델링을 하고 식당 가구 자재를 새롭게 장만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왕 사장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출·퇴근 때마다 휴대하고 다녔던 외상장부 가방이었다. 외상장부는 저금통장과 같은 재산이었다. 가방 속의 자그만 장부들을 펼쳐 놓으니 10년이 넘은 것도 있었다. 대부분 주변의 도청, 교육청, 경찰서 등 공무원들 것이었다.

월급날 수금하러 가면 자리에 없거나,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제때 수금하지 못해 액수가 불어났다. 외상값을 대충 계산해보니 5년 치 집세였고 건물을 사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그 보다 찾아가지 않은 시계며, 반지, 팔찌 등 불타 없어진 것이 안타까웠다.

왕 사장은 외상값을 받아내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러나 장부를 들고 사무실을 찾아가 보면 외근이나 출장이고, 부서를 옮긴 이들이 많아서 허탕을 치는 날이 많았다. 개인보다 사무실별로 된 장부가 대부분이어서 총무를 맡은 사람이 전출해버리면 개인별로 계산을 해내기 어려웠다.

그나마 만나는 사람 중엔 안 됐다며 은행 계좌로 입금해주는 양심적인 사람들도 있었으나 내일, 모레 하며 자리를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던 중 홍민태를 생각해 냈다. 언젠가 음식값 문제 때문에 영업정지가 내려졌을 때 돈으로 해결해 준 사람이었다. 그는 도청의 말단 공무원에서 시작해 인사담당관을 거쳐 현재는 도지사 비서실장 직위에 있었다. 왕 사장은 그를 이용하면 외상값을 쉽게 수금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비서실 앞에서 기다리는데 홍 실장이 특유의 아장걸음으로 계단을 올라왔다. 홍 실장은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는 왕 사장을 단번에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안 좋은 소식 들었어요. 잘 복구하고 있지요?"

"예. 저 차 한 잔 주십시오."

"그럽시다. 이리 들어 오세요."

그는 비서실 안의 자신의 방으로 왕 사장을 안내했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명패가 빛났다. 비서실 직원이 차를 내오자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도청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왕 사장은 가방을 열어 미리 정리해 놓은 도청 장부들을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한 푼이 아쉬워서 수금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탁자 위에 깔린 장부를 보면서 홍 실장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외상이 많이 깔렸죠?"

"예. 제때 수금 못 해서요. 이중 절반만 받아내도 큰 도움이 될 텐데."

장부들을 하나씩 살피던 홍 실장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 내 것도 있네. 어디 보자. 어휴 많이 밀렸네요. 미안해요."

그는 일어서서 지갑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자 왕 사장이 따라가서 만류했다.

"아닙니다. 실장님 같은 분만 있으면 장사할 만하죠. 믿을 수 있으니까요."

말을 하면서 왕 사장은 준비해 온 봉투를 명패가 있는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도와주십시오. 실장님."

홍 실장은 밖을 한번 살피더니 마른기침을 뱉어내었다.

"뭘 이렇게 안 해도 도와 드릴 텐데."

그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서랍을 열더니 그 속으로 봉투를 재빨리 밀어 넣고 닫았다. 그리고는 손을 비비며 자리로 와서 장부들을 집어 들었다.

"이거 오래돼서 부서들 옮겼을 텐데. 에이 나쁜 사람들. 잠깐만 내 생각이 있으니, 기다려 봐요."

말을 마치더니 홍 실장은 비서실 직원을 불렀다. 직원이 들어오자 장부들을 넘기면서 현재 부서명을 찾아 정리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일일이 전화를 걸어서 화재 당한 사람 돕자는데 내가 앞장섰다고 해."



그의 힘은 대단했다. 말로는 독려고 권유한 것이지만, 실세의 말을 거역하면 어떤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봐 많은 이들이 외상값을 통장으로 송금해 왔다. 왕 사장은 권력의 위력에 감탄했다. 목돈이 생기자 왕 사장도 활력을 되찾았다.



"헌데 네 생각이 나더라고. 입학 선물로 내가 여행비 댈 테니까 같이 가자"
장석규 씨를 대면해야 한다는 게 꺼림칙했다
용찬은 해연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라도 그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잔뜩 웅크리고 있는 2월 중순에 접어들자, 용찬은 하숙방도 구하고 학교도 구경할 겸 상경했다. 해연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지만 만나면 분위기만 이상해질까 봐 전화도 하지 못했다.

캠퍼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고 웅장했다. 용찬은 입학 수속을 마치고 다닐 학과 건물을 찾아 강의실 문을 열어 구경했다. 고등학교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여서 마음이 부풀었다. 학교 앞 전봇대와 커피숍 입구에는 제철을 맞아 하숙생을 구하는 전단이 수북이 붙어 있었다. 광고된 하숙집을 직접 찾아다니며 꼼꼼히 살피는데 고등학교 선배를 만나 그의 소개로 집을 정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금산이 마음에 걸렸다. 화재 이후 그에게 위로 전화 한 번 못한 게 미안했다. 용찬은 공중전화를 찾아 금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급히 의논할 게 있으니 인천으로 와."

용찬은 의무적으로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동인천역에 내려 알려준 대로 그의 직장을 찾아갔다. 상냥한 직원의 안내로 사무실에 앉아 기다리는데, 잠시 후 기름때가 잔뜩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금산이 나타났다. 그는 직원휴게실로 용찬을 데리고 갔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며 금산이 말했다.

"지난번 불났을 때 내려갔는데 연락 못 했다. 너 합격 소식도 들었지만, 직장 일도 바빴고 경황이 없었다."

"뭘, 내가 진즉 위로 전화라도 해야 했는데, 미안하다."

"미안하긴 서로 바쁘니까 그렇지. 일이 원만하게 풀려 식당도 리모델링 하고 있으니 된 거지."

금산이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건네며 사람 좋은 웃음을 날렸다.

"헌데 말이야. 너 중국 안 갈래?"

"웬 중국?"

"종필이 아버지 있잖아? 중국에다 땅을 임대 내어 무슨 사업을 한다는데, 그게 잘 안 됐나 봐."

"종필이 형, 가스 나오면 부자 된다고 큰소리쳤는데?"

"사기당했나 봐. 소송하려는데 말이 통해야 말이지. 현지 통역은 믿을 수 없었는지 놀고 있는 우리 아버지한테 S.O.S 때린 거지."

방화한 것을 숨기고 뻔뻔스럽게 도움까지 요청하다니 도대체 그는 어떤 심장을 가졌을까? 용찬은 장석규 씨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너도 가는 거야?"

"랴오닝에 우리 할아버지 고향이 있거든. 작은할아버지가 살아계신다는 소식도 들었고. 아버진 내 교통비까지 대는 조건으로 응락 했어. 헌데 네 생각이 나더라고. 입학 선물로 내가 여행비 댈 테니까 같이 가자. 가면 종필이도 만날 수 있을 거야."

몇 년 전, 해연의 이모 집에서 했던 말을 기억해 준 금산이 고마웠다. 여행 기간이 입학식 전이어서 금산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단지 장석규 씨를 대면해야 한다는 게 꺼림칙했다. 그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용찬의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불빛 속에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도 내 얼굴을 보았을까? 보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마하려 했겠지.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이 되었다.

용찬은 해연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라도 그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주 공항에서 만나 인사를 했을 때, 왕 사장은 동행하게 된 용찬을 살갑게 맞아주었으나 장석규는 받는 둥 마는 둥 여전히 거만했다. 용찬은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매우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김포 공항에서 금산이 합류할 때까지 지속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공항에 도착하니 여행사 가이드가 자동차를 대기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마주친 중국인들을 보면서 용찬이 느낀 것은 너무 여유를 부리며 느리다는 것이었다. 기차 시간에 대려면 시간이 촉박한데도, 짐을 찾고 입국 수속 하고 공항을 빠져나오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만만디(晩晩的)라는 말이 생각났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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