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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장편 연재/갈바람 광시곡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6)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19. 06.13. 2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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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6-3. 대륙에서의 며칠




낭패감에 젖은 그들의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인민복을 입은 공사 관리자가 다가오더니 당 위원회를 찾아 가보라고 했다. 당 위원회 사무실은 권위를 상징하듯 당당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도시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금산은 로비 입구에 있는 안내소로 다가가 메모를 내밀었다.

"혹시, 이 주소에 살던 왕치영 씨라고 아십니까?"

군복을 입은 여자 직원이 귀를 의심하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일행을 살폈다.

"지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왕치영 씨 맞습니까?"

"예. 저희 할아버지 됩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한국에서 왔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삽화=고재만 화백

직원은 전화기를 당겨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일행은 서로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직원이 받아보라며 수화기를 내밀었다. 왕 사장이 얼른 건네어 받았다.

"예. 한국에 사는 왕치관 씨 아들입니다. 숙부님 만나 뵈러 왔습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반가워하는 웃음과 함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에서 왔다고? 치관 형님 아들이란 말이지? 기다려 곧 갈 테니."

전화를 끊자 안내 직원은 왕치영 씨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는 랴오닝성 공산당 간부로, 강하가 속한 넓은 지역을 총괄하는 당 관료인데 관내 출장 중이라고 했다.

'곧'이라고 했지만, 직원은 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알려주었다.



유골을 바다에 뿌리며 왕 사장은 자식과 용찬이 있는데도
체면 불고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 고향에 돌아왔으니 편히 쉬세요"


그들은 위원회 건물에서 나와 바닷가로 갔다. 포구 어구에서부터 비릿하면서 역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상쾌하고 시원한 제주의 바닷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냄새였다. 찰랑대는 물결을 깔고 앉은 고깃배들과 화물선이 촘촘하게 묶여있는 항구는 꽤 규모가 컸다.

용찬과 금산이 바닷가에 서서 배 위의 사람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는데, 왕 사장이 가방 속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꺼냈다. 분말이 된 유골이었다.

모친이 돌아가자 제주에 와서 처음 보았을 산지천이 바라보이는 사라봉 언덕 기슭에 화장하여 몰래 묻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땅 한 뼘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부친이 돌아가자 역시 화장하여 모친과 합장했다.

중국에 갈 계획이 잡혔을 때, 왕 사장은 유골 단지를 꺼내어 반은 산지천에 뿌리고 반은 봉지 속에 담아왔다. 유골을 바다에 뿌리며 왕 사장은 자식과 용찬이 있는데도 체면 불고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 고향에 돌아왔으니 편히 쉬세요."

금산의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달렸고, 그것을 바라보는 용찬의 마음도 짠했다.



항구 도시라고 하지만 강하는 한국의 여느 소도시처럼 빌딩도 많았다.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난 때인데도 시장은 사람으로 붐볐다. 그들은 식사를 대부분 밖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가족 단위가 많았다. 가족이라고 해야 자식 한 명과 부부가 전부다. 간혹 어린 애가 두어 명 있는 가족은 위력 있는 군이나 당 간부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시장에는 처음 보는 과일과 식재료가 많았다. 갖가지 음식을 만드는 가게에서 나오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으나 향신료 때문에 먹지 못할 음식이 많을 거라고 금산의 아버지가 말했다. 일행은 간단하게 주전부리를 하고 어슬렁거리다가 시간에 맞춰 당 사무실로 갔다.



여직원을 통해 도착 소식을 전해 들은 왕치영 씨는 접견실에 있는 그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하게 했다.

그의 사무실은 화려했다. 붉은색으로 도배된 방에 들어서니 벽에 써 붙인 선전 문구와 격문에 압도되는 분위기였다. 등치는 작았으나 인민복을 입은 깐깐하게 생긴 왕치영 씨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앞장선 왕 사장이 다가가 고개 숙이며 인사하자 그가 포옹하며 반갑게 맞이했다. 금산이 인사한 다음 용찬을 소개했다. 간간이 낮은 소리로 금산이 통역을 해주었으므로 용찬은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었다.

직원이 차를 들고 들어오자 일행이 자리에 앉았다. 왕치영 씨는 불청객들이 반가운 듯 상기된 얼굴에 웃음을 달고 왕 사장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외조부께서 고향을 잊지 말고 강하의 룡이 되라고 강룡이라 지어주셨답니다."

"왕강룡, 이름 좋구만. 그래 한국 가서 용이 되었나?"

왕 사장은 뒷머리를 긁으며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저 음식점 하며 애들 키우고 먹고살 만합니다."

그는 생면부지 조카가 믿기지 않은 듯 왕 사장을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그래 자네한테서 형님 모습이 보이는구만. 꼭 닮았어."

용찬이 보기에는 금산의 부친과 그가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었다. 살아온 환경이 얼굴을 만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왕 사장은 가방에서 꿩엿, 말린 전복과 표고버섯을 꺼내 탁자 위에 풀어놓았다.

"약소하지만 제주에서 가져온 겁니다."

"한국에 살면서 윗사람 공경하는 예의는 형님이 잘 가르쳤구만. 고맙다."

왕치영 씨는 선물들을 살피며 만족한 듯 호탕하게 웃었다.

"치관이 형이 떠났을 땐 원망도 많이 했지. 부모님도 장남을 보내놓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하지만 크면서 알게 되었어.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외국에 나가서 뿌리내리려면 고생도 무진 많았겠지. 헌데 그렇게 젊은 나이에 고향 땅도 밟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니 안 됐구만."

"유골을 가져다 항구에 뿌려드렸습니다."

"잘했다. 생전에 꼭 한번 뵙고 드릴 말도 많았는데."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자 왕치영 씨의 시선이 금산과 용찬에게 쏠렸다. 통역을 해주는 금산을 보고 그가 한마디 했다.

"그래도 잊지 않고 우리말을 곧잘 하는 모양이구만. 암 모국어를 잊지 말아야지. 한때는 세계의 중심에 섰던 한족의 후손이니까. 우리 한족들은 근성이 있어서 어떠한 상황, 어느 곳에서도 잘 적응하며 살아가지. 난 우리 한족은 우엉 같다고 생각해. 자네 우엉 아나?"

"그럼요. 대를 이어 식당 해 먹고 사는데요. 그 우엉이라는 것이 수레바퀴에 깔려서도 꿋꿋하게 일어서는 식물 아닙니까?"

"암. 우리는 기원전 1100년경부터 청 왕조가 붕괴한 1911년까지 무려 3,790회의 전쟁을 겪은 나라야. 거의 매년 1회 이상 싸움을 하며 견뎌 왔지. 허나 이제는 무력이 아니라 경제가 힘인 시대야. 우리 중국의 놀라운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게 될 날도 멀지 않았어, 그간에 외국 나가 고생한 화교(華僑)의 힘도 무시하진 못하지."



화교란 명칭은 화교(華僑) 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한 데서 비롯된다
여기서 화(華)는 중국인을 뜻하며, 교(僑)는 임시적인 거처를 뜻하는 말로써
화교는 중국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중국인의 숫자는 통계 잡힌 것만 13억이라 하는데, 여기엔 산아제한 정책으로 등록하지 못한 아이들의 숫자는 제외된 것이다. 사실 전산망도 체계화되지 않은 상황이고, 외부와 격리된 오지 마을도 많아서 인구 통계를 정확하게 할 수 없다.

싱가포르 인구의 70% 이상이 화교이고 동남아를 비롯한 미국, 유럽 등 세계 많은 나라에 5 천여 만 명의 화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화교란 명칭은 청나라 말기인 1898년 일본 요코하마에 이주한 중국인들이 학교를 세우고 화교(華僑) 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한 데서 비롯됐다. 여기서 화(華)는 중국인을 뜻하며, 교(僑)는 임시적인 거처를 뜻하는 말로써 화교는 중국 본토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한국에 화교가 자리 잡은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다. 청나라는 조선의 요청으로 3,000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이때 이들을 따라와 장사하는 화상(華商) 40여 명이 있었는데 난 이후에도 조선에 남아 살았다. 이들이 문헌상 최초의 한국 화교다.

청군이 조선에 온 한 달 후, 청조(淸朝)는 조선과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청과 조선 간의 무역 관계를 맺었다.

한편, 일본은 1876년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맺어 외국인에 조선 사회를 개방하게 했는데, 1882년에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은 3,622명에 달했다. 이때 일본 항구에 살던 화교들도 부산에 이주해 정착했다.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면서 지금의 인천광역시 선린동 일대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만들어졌다. 이 무렵 중국의 산동 반도와 인천항 사이에 범선과 여객선이 정기적으로 운항하였고, 중국인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화교 숫자가 크게 늘었다. 서울에 약 350명이 살았고, 인천에 48명이던 화교는 235명으로 늘었다.

이후 원세개(袁世凱)가 조선 통상 사무를 맡아 1887년에는 부산, 1889년에는 원산에 조계지에 대한 담판을 성공시켜 중국 조계 지역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1890년에는 화교가 약 1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화교들이 온전하게 정착하게 된 것은 1894년 11월 양국이 청상보호규칙(淸商保護規則)을 제정하면서다. 그 이전에는 조선의 상업권이 완전히 일본인의 손에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 인천에는 중국의 건축 양식을 본뜬 중화음식점 건물이 많이 세워졌는데, 한국 최초의 차이나타운 모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덩샤오핑(鄧小平) 주석께서 1978년 개혁·개방을 한 이래 우리는 놀랄만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지. 한국과 수교도 맺었고 이젠 세계 어디든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게 되었어. 그래서 나도 우리 13억 인구를 활용한 해외 진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젊은 화교 금산이가 도울 일도 많을 거야."

금산은 칭찬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었다.

"제가요? 흐흐흐."

"내가 고문으로 일하는 처남 회사가 있는데 거기서 요즘 해외개발부를 만들어 한국을 상대로 사업을 계획하고 있어. 참 시장하지? 자 나가자구. 맛있게 식사를 한 다음 랴오닝 그룹을 소개해 줄게."



그날 왕 씨 부자와 중국의 실력자 왕치영 씨 그리고 랴오닝 그룹과의 만남은 훗날 왕금산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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