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7)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7)
  • 입력 : 2019. 06.20(목) 2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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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7-1. 카이로스를 붙잡다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게 산 사람이다.

용찬의 대학 생활도 그렇게 바쁘게 흘러갔다. 동해 용왕의 아들 처용이 인간 세상에 나와 인간들 사는 모습에 빠져 세월 가는 것 몰랐듯이 용찬의 대학 생활 일 년도 그랬다. 섬에서 나와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다 보니 정말 가는 줄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됐다
많은 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부실채권이 증대했다
재무구조의 취약함과 불투명성, 부동산 투기, 외국여행 등
과도한 소비가 IMF를 불러온 주요 요인이었다


용찬은 대학 내 동아리 이티(ET)에 가입했다. 이티는 이코노미 트랜드(Economy Trend) 즉 경제 동향의 이니셜로 시사경제 연구동아리였다. 주로 정경 계열과 사회학과, 신문방송학과 등 정치, 경제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이티는 격주 토요일 오전에 정기연찬회를 열고 미국의 시사 경제 잡지와 신문에 나타난 정보를 중심으로 발표하고 토론을 벌였다. 용찬은 국내 신문에는 나오지 않는 한국의 상황을 외국인의 시선에서 알 수 있었다.

삽화=고재만 화백

가끔 대기업이나 정부에서 일하는 이티 출신 선배들을 초청하여 대화를 나누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발표자는 순번에 의하지만, 토론에 참여하려면 사전 지식과 정보가 필요하므로 인터넷에 수시로 들어가서 외국신문을 검색해야 했다. 시사용어에 대한 이해나 어휘력이 달려서 한 문장을 이해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연찬회 준비에, 과목마다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 때문에 용찬은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살았다.

용돈을 위해 아르바이트도 뛰어야 했기 때문에 방학에도 고향에 가지 못했다. 대신 아들을 보고 싶은 어머니가 방학마다 서울에 왔다. 집에서 만든 볶은 멸치와 소라 젓갈 등 밑반찬을 바리바리 들고 다녀가면서 다음 방학에는 꼭 내려와서 친족들에게 인사도 드리라고 당부했다.

이웃들에게 아들을 자랑하고 싶은 성화라는 걸 용찬도 알았다. 그러나 방학이 되면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제일 급한 것이 졸업을 대비한 토익 강의 수강이었고 방학임에도 계속되는 동아리 정기 모임, 그리고 아르바이트에 잠깐의 짬도 내기 어려웠다.



2학년을 마칠 무렵 동아리에서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됐다. YS 정부가 들어서면서 외국의 신문에는 한국의 경제 정책과 상황에 대해 위험한 사태 발생을 경고하는 다수의 경제학자 칼럼이 실렸다.

1994년부터 무리하게 세계화를 추진하는 과정에 외채위기가 시작됐다. 1996년에 정상수지 적자가 237억 달러에 이르자 외환 보유고가 바닥이 났다. 외채가 급증해 한보기업, 기아그룹 등 수 많은 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부실채권이 증대했다.

재벌과 권력의 정경유착, 관치금융 특혜 과다 차입으로 인한 재무구조의 취약함과 불투명성, 부동산 투기, 외국 여행 등 과도한 소비가 주요 요인이었다. 결국, 1997년 나라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배력 아래에 놓이게 됐다.

돈줄은 마르고 기업의 주요 사업들이 중단되자 하청 업체들이 줄도산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업체들은 구조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근로자를 해고하여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문 닫는 가게들이 많아졌고, 노숙자가 생기고, 상품이 덤핑 되어 나왔어도 팔리지 않았다. 가족이 해체되는 현상도 일어났고 인간관계는 사막처럼 변했으며 사회는 팍팍해졌다.

용찬이 아르바이트하던 출판사, 맥주 카페, 노래방도 적자를 감당 못 해 문을 닫았다.



학비 마련하기 어렵다는 걸 안 용찬은 군대 다녀오기로 작정했다.

2년 만에 본 제주는 많이 변해 있었다. 도심에는 새로운 길이 뚫리고 높은 건물이 많아졌으며 거리에선 외국 관광객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대룡반점도 새 단장을 하여 성업 중이었다.

IMF 사태를 맞았어도 중국집은 오히려 사람들로 붐비었다. 짜장면값을 3,000원으로 올렸지만 다른 음식보다 싸고 맛있는 음식이었으므로 점심시간에는 줄을 서서 기다리야 할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외상없이 현금을 받았으니 그만한 장사도 없었다.

용찬은 오후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대룡반점에 들러 인사를 하려 했으나, 금산의 부모는 밀려드는 배달 전화에 주방에서 나올 틈이 없었다. 보조조리사를 두고 배달원 셋에 두 명의 홀 서빙 직원을 둔 걸 보면 꽤 장사가 잘되는 모양이었다. 예전의 벽면에 걸렸던 웍과 칼은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극고내로(克苦耐勞)의 액자도 황금색 액자에 새롭게 장식되어 걸려 있었다.



용찬이 한참을 기다려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 일어서려는데 뜻밖에 반가운 사람이 들어왔다. 중국에 있어야 할 종필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의 어깨는 축 내려앉았고 얼굴빛은 매우 어두웠다. 중국에서의 호기롭던 모습은 헝클어진 머리와 세수도 안 한 것 같은 부스스한 노숙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용찬과 눈이 마주치자 종필은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오른손을 들며 가까이 왔다.

"어, 용찬이 오랜만이네?"

"형. 여긴 어떻게?"

"밥 먹으러 왔지. 오늘 첫 끼니다."

내미는 손을 맞잡았으나 힘이 없었다. 그는 의자를 잡아당기며 앞자리에 앉았다. 용찬은 직감적으로 중국에서의 사업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중국에서 언제 왔어요?"

"너 아직 소식 못들은 모양이구나? x 같은 중국놈들한테 보기 좋게 당했다."



종필은 그간의 일들을 쌍소리를 섞어가며 설명했다.

몇 달에 걸쳐 여러 곳에 시추 작업을 하며 천연가스를 확인했다. 그런데 여러 학자와 전문가들의 결론은 가스의 질과 양이 경제성이 없다는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임차받은 땅은 오십 년 동안 내버려 둘 수도 없어서 그 넓은 땅에 배나무만 심어두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IMF를 맞아 건축 경기도 없고, 은행 빚에 사채까지 끌어 썼으니 이자도 감당하기 어렵다. 거기다 날마다 빚쟁이들 난리 때문에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시련은 사람을 단련시켰다. 종필은 중국에 다녀온 후 세상 이치를 깨우친 것 같았다.

"야. 우리 막걸리나 한잔하자"

그들은 종합시장 내의 순대국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종필은 사발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영웅담처럼 과거 자신의 집안 이야기부터 늘어놓았다.



"아니 어떻게 2천만 원으로 50억의 부동산을 차지할 수 있단 말이에요?"
"건달들의 생명이 의리 아냐? 은행들이야 대출자를 찾아야 먹고 살 수 있고."
"아무리 그래도. 상식적으로 이해 안 돼요."




할아버지 장동철 씨는 대법원 판결에서 징역 1년에 벌금 2천만 원이 확정되어 도의원 생활 1년 만에 당선 무효가 되면서 구속되었다. 그는 초선이었지만 돈의 힘으로 사람을 모으고 각종 인연을 동원하여 도의회 부의장이 되었다.

장동철 씨가 부의장이 되는 데는 장석규의 힘이 컸다. 장석규는 건설회사의 사장이지만 조폭 건달 출신이었다. 그는 똘만이들을 이용하여 의원들에게 접근했고 돈과 주먹으로 부친을 부의장으로 만들었다.

장석규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무수히 맞으면서 자랐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도통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싸움질하는 놈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중학교 시절부터 폭력사건으로 경찰서에 불려 다녔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사고를 되풀이하며 무기정학과 퇴학을 맞으면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도내에서는 더 이상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 결국 경기도 사립 학교에 돈을 주고 졸업장을 샀다.

장동철 씨는 힘으로 아들을 이겨보려 했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선 때리는 골프채를 빼앗아 꺾어버릴 정도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모친은 사고 뒤처리하느라 월수 붇듯이 돈 싸 들고 경찰서와 피해자를 찾아다녔고, 합의금을 대느라 부동산까지 처분해야 했다. 패싸움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등 그는 스물의 나이에 폭력 전과 2범이었다. 그나마 경찰 출신인 장동철이 연줄과 돈으로 무마한 게 그 정도였다. 모친은 화병으로 젊은 나이에 돌아갔는데 장석규는 감방에 있어서 임종도 하지 못했다.

장석규는 그때야 정신을 차려 부친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장동철의 부동산을 관리하며 토건 회사를 설립했다. 대지나 임야, 밭 등을 팔아선 이윤이 얼마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토지를 정리하고 상하수도 관을 설치하고 길을 내야 땅값을 몇 배로 받을 수 있는 것을 알았고, 이후에 건설회사를 만들어 건물을 지어 분양하는 사업으로 발전했다.

그는 담당 공무원들을 매수하여 관에서 발주하는 공사 사업권을 따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면서 야심을 품고 각종 사회단체에도 가입했다. 그것은 정치계에 입문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아니 어떻게 2천만 원으로 50억의 부동산을 차지할 수 있단 말이에요?"

"건달들의 생명이 의리 아냐? 은행들이야 대출자를 찾아야 먹고 살 수 있고."

"아무리 그래도. 상식적으로 이해 안 돼요."

"아버진 모 은행장과 사회봉사단체에서 만났어. 말이 봉사단체지 그 단체는 야망 있는 사람들의 사교 모임이지."

좁은 지역사회일수록 네트워크의 힘은 강했다. 장석규 씨가 참여하고 있는 사회단체 모임에 지역은행장이 가입하게 되자 그에게 접근해 형제처럼 지냈다. 은행장도 분양사업 등 큰돈이 오고 가는 건설회사 고객을 놓칠 리 없었다.

어느 날 은행장의 모친이 돌아가자 장석규 싸는 만사를 제쳐 두고 상주처럼 장례식장을 지키며 호상인을 자임했다. 숙부와 동생이 상을 당했을 때, 상주 노릇은 나 몰라라 했던 그가 생면부지 남의 모친 상은 정성으로 지켰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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