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8)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8)
  • 입력 : 2019. 06.27(목) 20:2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강준 작/고재만 그림


7-2. 카이로스를 붙잡다


그 후로 은행장과는 친형제처럼 친해졌고, 은행장은 장석규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장석규는 평소 건설 담당 공무원들과 교류하면서 고급정보들을 많이 얻었다. 머지않아 도시계획에 의해 도심에 새로운 도로가 생긴다는 정보를 얻었다. 장석규는 부친 명의의 건물에서 벗어나 건설회사의 면모를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시내 중심가에 매물이 나온 것을 찾아냈다. 획정된 계획에 의해 새 도로변 중심에 위치하게 된 건물이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더니 IMF라는 환난 중에도
이렇게 횡재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금산은 기회의 신 카이로스를 붙잡은 것이었다


당시 그 빌딩은 시가로 20억 원 가까이 되었는데 장석규에게는 현금이라곤 긁어모아도 2천만 원 정도였다. 그래서 일단 남이 차지하지 못 하도록 계약금을 물고 그 건물과 다른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20억 원을 대출받았다.

삽화=고재만 화백

지방에서 그런 거액을 대출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은행장이 적극 도왔다.

"우리 아버지 배포로 봐선 대출 대가로 은행장에게 흘러간 돈도 상당할걸?"

건물을 인수하여 회사를 옮겼으나, 건설 경기가 좋지 않아 은행 이자를 대기가 어려웠다. 이자가 밀리기 시작하자 안달이 난 것은 은행장이었다.

"장 사장이 이러면 나만 곤란해져."

"글쎄 형님도 알다시피 요즘 경기가 어렵잖아요? 있으면서 일부러 이러는 것도 아니고."

"이사회에서 액수가 많다고 원칙적으로 안 된다는 걸 내가 책임지기로 했는데."

"그럼 끝까지 책임지세요. 불량 채권 안 만들려면."

"불량 채권이라니? 장 사장, 그게 무슨 말인가?"

"형님, 나를 믿으세요. 경기가 계속 이러진 않을 것 아닙니까? 나도 다 생각 있으니, 우리 부친 건물 담보로 조금만 더 대출해줘요."

이자와 회사 운영비를 위해 다시 대출을 받고, 해가 바뀌면 또다시 불어나는 이자를 위해 대출을 받았다. 은행장은 이사회에서 추궁을 받았으나 받아먹은 것 때문에 장석규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2년 후에는 대출금이 30억 원이나 됐다.



그런데 장석규의 예상대로 도시계획에 의해 도로가 뚫리고 새 건물들이 들어설 즈음에 건설 경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만히 앉아서 얻은 행운이 아니라 새로 뽑힌 도지사의 힘이 컸다. 장석규는 지방 선거에서 유력한 지사 후보인 전형진 캠프에 재정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적극적으로 일했다.

전 지사가 당선된 후에는 장기적으로 예정된 도시계획을 시급히 시행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장석규의 빌딩도 새 도로가 개통되면서 그 가격이 배 이상 뛰었다.

장석규는 빌딩을 처분하여 은행 빚을 갚고도 20억 원의 차익을 남기고 신시가지에 새로 회사 빌딩을 지었다. 그게 3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장석규의 건설회사도 IMF 사태에 위기를 맞았다. 중국 사업은 실패로 끝났고 빚은 늘어났다. 부친에게 사정하여 물려받은 부동산은 똥값이 되어 버렸고 그나마 팔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장석규는 재기를 노리고 정치적 야심을 불태웠다. 다가오는 지방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무슨 선거야? 할아버지 한을 푼다나? 에고 우리 집안 완전히 폭망하게 생겼다."

울분을 삼키듯 종필은 막걸리가 가득 담긴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냈다.



용찬은 입대하여 기초훈련을 받고 김포공항 근처에 있는 포병부대에 배속되었다. 행정 병과를 요청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비밀서류 취급을 할 수 없었다. 부친의 간첩죄 전력 때문이었다.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고, 포대를 밀고 뛰어다니고, 화약 냄새가 늘 몸에 배었다. 훈련에 나가면 적진 가까이 가서 좌표 설정하여 보고하는 반복된 생활이었다.

그러던 중 사격대회에서 우승하여 포상 휴가가 주어졌을 때, 용찬은 인천으로 가서 금산을 만났다. 몇 번 놀러 오라고 전화를 해댔던 금산이였다. 독립했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금산은 정비 센터 사장이었다. 부친으로부터 현금을 지원받아 부도 사태에 직면한 정비 센터를 인수했다.

그의 공장에는 많은 소형차와 대형버스가 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차가 이리 많아?"

"저거 다 내 차야."

용찬은 놀라며 금산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는 넉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료비, 수리비를 감당하지 못해 내놓은 것을 헐값으로 인수한 것도 있고, 팔아달라고 맡아 놓은 차도 있지. 공장이 좁아 넓은 야적장에 쌓아놓은 차들이 몇 배는 더 많아. 나 금방 부자 될 거야."

IMF를 맞아 사람들은 찡그리고 한숨 쉬는데 금산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용찬은 평소 허풍이 심했던 금산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부자 되다니, 어떻게?"

"저거 수리해서 중국으로 수출할 거야. 우리 작은 할아버지와 합작하고 있거든."

당시 회사가 쓰던 차들, 간부들이 타던 공용차, 대출받아 구입했던 자가용, 택시, 버스 회사들이 도산하면서 나온 중고차들이 넘쳐났다.

금산은 중국의 왕치영 씨에게 자금을 원조받아 사들인 차를 중국으로 수출하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용찬은 난세에 영웅이 난다더니 IMF라는 환난 중에도 이렇게 횡재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금산은 기회의 신 카이로스를 붙잡은 것이었다.



"우리 왕 사장님은 대룡반점 건물 인수했어."

"아니 외국인도 부동산 취득이 가능한 거야?"

"대통령이 바뀌니까 제한이 풀렸대."

"네 아버지 원을 풀었구나. 자기 죽어 묻힐 땅 한 조각 갖는 게 소원이라 했는데. 건물주가 되었으니."

"간섭받지 않고 장사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잘 된 거지. 종필 아버지가 얼마나 지독하게 갑질을 해댔는데. 사람들 데려와 외상 먹고 갚지 않은 것만도 엄청 많아."

용찬은 대룡반점 화재 때의 그의 모습이 생각났으나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아. 종필이 부친 선거 때문에 현금이 필요했겠구나?"

"사채 이자도 감당 안 됐을 테고, 선거하며 빌려 간 돈도 있고. 그래서 부담 없이 인수했지."

"그래도 어려운 시절인데 현금 많이 있었네?"

"우리 민족성이 원래 그래. 은행도 믿지 못해 현금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쌓아두거든."

"참, 장석규 씨 당선은 됐어? 그 양반 부친 조직 물려받았으면 잘했을 텐데."

"에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잘 나가더니 조폭 전력이 들통나고 과거 성폭력으로 처녀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꼴등 했어."

"저런. 정말 종필이 말대로 폭망했구만."

"흐흐흐. 그 때문에 종필인 출세했지."

"출세? 어떻게?"

"장석규 씨는 회장으로 물러나 앉고 종필이가 건설회사 운영해. 곧 죽어도 사장이야."

"야, 난 군바리 신센데, 너넨 둘 다 사장이네?"



장동철 씨는 숙환으로 인한 가석방으로 출소한 이후 줄곧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노환이 지속 되자 재산을 정리해서 상속했는데, 종필이도 한 몫 챙겼고 그걸 밑천으로 부친의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것이었다.



하얀 깃에 동그란 하얀 무늬가 점점이 박힌
빨간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곱게 딴 여인은 왕리화였다
그녀는 또래의 다른 애들보다 조숙했었는데
어느새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해 있었다


용찬의 군대 생활이 말년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합동 전시훈련을 다녀온 직후라 피곤도 풀 겸 늘어지게 낮잠을 자려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내무반에 누웠는데 아가씨가 면회 왔다는 통지를 받았다.

아가씨란 소리에 해연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대학 입학 전에 보고서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종필을 통해서 해연이 교대에 입학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벌써 졸업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틈틈이 생각날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잊고자 했으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여자였다. 남자에게 첫사랑은 지울 수 없는 화인이다.

어떻게 변했을까? 벌떡 일어나 앉은 용찬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여기 근무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용찬은 이런저런 생각하며 면회실로 뛰어갔다. 면회실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있던 웬 여자가 일어서며 손짓을 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해연은 아니었다.

"오빠, 여기."

하얀 깃에 동그란 하얀 무늬가 점점이 박힌 빨간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곱게 딴 여인은 왕리화였다. 화사하게 차려입고 화장까지 한 그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또래의 다른 애들보다 조숙했었는데 어느새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해 있었다.

"오빠, 이거 먹어."

그녀는 준비해온 음식들을 풀어내고는, 닭다리를 들고 내밀었다.

"학교 졸업했어?"

"졸업반이야. 나 인천에서 학교 다니는데 인천 왔으면 집에도 들리고 그러지?"

"군인이라서 그렇게 한가하지 못해."

용찬은 닭다리를 씹으며 리화의 모습을 힐끔거렸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그녀의 예쁜 모습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 오빠 보고 싶어서 지난 여름방학 때 오빠네 고향 집 놀러 갔었어. 오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4994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