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문의 에세이로 읽는 세상] 장터에서

[허상문의 에세이로 읽는 세상] 장터에서
  • 입력 : 2019. 07.03(수) 00:00
  • 김경섭 기자 kks@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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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장터는 붐비고 활기차다. 장터에 가면 잃어버린 고향의 냄새와 맛, 소리와 감촉까지 느낄 수 있다.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싸우고, 흥정하는 장터 모습은 마치 숙성된 장맛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의미가 진해진다.

나는 슈퍼마켓이나 백화점보다 장터를 어슬렁대며 구경을 하거나 물건 사기를 좋아한다. 백화점에서는 물건을 사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깨끗하고 우아하게 잘 진열된 상품들 사이를 걸으면서 귀족적으로 물건을 고르고 장바구니에 넣고 계산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장터에서는 다르다. 장터에서는 굳이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장터에서는 물질적인 데보다는 정신적이고 원초적인 교감이 있다. 꼭 무엇을 사지 않아도 부자가 된 듯하고 물건을 파는 아저씨들이나 주름진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절로 힘이 솟는다. 장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오랜 가족이나 되는 듯이 정겹고 사랑스럽다. 그곳에서는 인간에 대한 회의나 세상살이의 박절함이 사라진다.

호박 한 덩이를 팔아도 행복했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 장터이다. 옛날부터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일 외에도 사람들이 모여 소식을 주고받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사람들의 말과 생각이 모이는 곳이었고, 그 지역 특유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곳이었다. 닷새마다 한 번씩 열리는 시골 장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시골 장은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는 축제일이고, 삶의 터전이며, 정보를 나누는 장소이기도 하다.

내가 외국에 나갔을 때도 먼저 찾는 곳은 그곳의 장터이다. 인도의 장터, 이집트의 장터, 중국의 장터에 가보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삶의 풍경을 단숨에 알 수 있다. 어디서나 장터에서는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초롱불이 다정한 눈빛으로 웃고 있다. 온정의 불빛이고 잃어버린 따뜻함의 불빛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 속에서 절로 사람들의 체취가 풍겨 나오고 소박한 사랑이 넘쳐난다. 장터에 서면 언제나 첫사랑에 홀린 사람같이 된다. 인생에 반하고 사람에 반하고 갑자기 착하고 순박한 마음이 된다.

"싸구려요, 싸구려! 참외가 한 보따리 오천원! 그저요! 그저!" 외침 소리는 절박한 생존의 목소리라기보다는 그저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는 베풂과 사랑의 목소리같이 들린다. 싸게 달라고 조르는 손님과 못 이기는 척 덤을 주는 상인, 이들 사이에서는 정이 넘치는 훈훈한 흥정이 이루어진다. 꼭 큰 이익을 남기지 않더라도 가진 것을 그저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고자 하는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크게 가진 것 없으면서도 누군가와 무언가를 나누어 갖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고결한 마음이다.

지금도 여전히 장터는 열리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생생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의 무대가 펼쳐진다. 그 속에는 반가움과 그리움과 추억이 오롯이 담겨있다. 누군가 "장터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이며, 시대의 희로애락을 말해주는 박물관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콩 한 되보다는 정(情)을 사가는 장터의 풍경과 인심이 자꾸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문학평론가·영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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