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9)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9)
  • 입력 : 2019. 07.05(금) 09: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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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7-3. 카이로스를 붙잡다




"필승!"

얘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지? 생각하는데, 같은 내무반 김 일병이 PX에서 간식을 사고 지나가다가 이죽거렸다.

"권 병장님, 여친 분 예쁘지 말입니다."

용찬은 얼른 리화의 얼굴을 살피며 손사래를 쳤다.

"여친 아니야. 동생이야 동생."

"그럼, 저한테 소개시켜 주지 말입니다."

"야! 너 데이트 방해할 거야?"

꽥 소리를 지르자 김 일병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큰 소리로 '필승!'을 외치며 물러갔다. 리화는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그럴 때는 영락없는 소녀였다.

"금산이랑 한집에 살아?"

"오빠 바쁘니까 내가 살림하고 있지. 참 요전번에 종필이 오빠도 집에 왔다 갔어. 인천에 비즈니스가 있어서 자주 온대."

"그래?"

용찬이 치킨 조각을 집어 들며 종필의 얼굴을 떠올리는데 리화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지난주에도 면회 왔다가 허탕 쳤어. 훈련 나갔대서."

"저런. 저번 주엔 전시훈련이라 야산에서 잠자면서 훈련했지."

"고생했구나. 헌데 오빠, 연말에 휴가 나와?"

"왜? 마지막 휴가 있긴 한데."

"그럼 잘 됐다. 내년이 밀레니엄이 시작되잖아. 그래서 12월 마지막 날 서울에서 아주 큰 축제를 연대, 나 거기 티켓 구해 놓았거든. 우리 같이 가. 응?"

"글쎄. 그때 가서 봐야지. 고향에도 가야 하고,"

"그날 하루만 놀고 가? 응, 오빠~."

면회와 준 성의도 고맙고, 리화의 응석 섞인 성화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일단 별일이 안 생기면 갈게."



용찬은 무심결에 포스터를 보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피아노 반주 출연자가 장해연이었다
출연진이 소개된 네모 안의 사진 속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용찬이 아는 장해연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연말이 되어 휴가증을 받으려고 중대본부에 갔을 때, 몇 사병이 사무실에 걸려 있는 포스터에 눈을 박고 있었다. 연말 불우이웃돕기 자선 음악회였는데 대대장 따님이 출연한다고 해서 행정 요원들이 티켓을 들고 부산스럽게 요란을 떨었다. 용찬은 무심결에 포스터에 눈길을 주었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피아노 반주 출연자가 장해연이었다. 출연진이 소개된 네모 안의 사진 속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용찬이 아는 장해연이 분명했다.

삽화=고재만 화백

용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음악회 티켓을 구입했다. 티켓을 손에 들고 보니 어머니가 마음에 걸리었다. 아들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에게 며칠 늦어진다고 미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신거(뭐라고)? 섣달 그믐날 아버지 제사 아니가?"

용찬은 뜨끔했다. 매년 치르는 부친의 기일을 리화와 약속하면서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휴가가 연기되었어요."

정직하고 순진한 사람도 연애를 하게 되면 거짓말쟁이가 된다.

용찬은 거짓말을 둘러댔다. 대를 이을 중차대한 청춘사업을 아버지도 용서해 주시리라 믿었다.

휴가가 시작되기 전날 리화에게서 전화가 왔다. 용찬은 아버지 제삿날을 깜빡 잊어서 고향에 내려간다고 했다. 리화는 울먹이며 실망을 드러냈으나, 용찬은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세모의 서울 거리는 새로운 천년을 맞는다는 설렘과 기대에 들뜬 젊은이들로 출렁거렸다. 꽃다발을 손에 쥔 용찬의 심장도 물레방아처럼 텅텅 뛰었다.

음악회 분위기에 맞추려고 세탁소에서 양복을 빌려 입었으나,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영락없는 촌놈임이 그대로 드러났다.

연주회장 로비에는 출연자 가족들인 듯 어린애를 동반한 사람들, 머리를 짧게 깍은 군인들도 많았다. 같은 중대에 근무하는 동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다가 멀리서 대대장의 모습이 보이자 기둥 있는 쪽으로 몸을 숨겼다. 용찬은 숨을 고른 후 용기 있게 대대장 앞으로 걸어가 큰 소리로 '필승!'을 외치며 얼굴도장을 찍었다.

갑을의 관계에서 을은 늘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은 관습일까 본능일까? 대대장 옆에서 아첨 떠는 장교들과 부관만 의연하게 움직였다. 장내의 안내 멘트가 들리자 사복을 입은 사병들은 출입문 맨 앞에 줄을 섰다가 극장 문이 열리자 굴뚝에서 나간 연기처럼 흩어졌다.



사회자의 소개를 받고 등에서 가슴까지 파인 하얀 연주복을 입고 해연이 무대로 나왔다. 광채가 눈이 부셔 한동안 용찬은 무대를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토록 가슴속에서 그리던 그녀는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뛰는 용찬의 가슴은 터질 것 같이 벅찼다. 의자에 앉자 그녀는 꿈에 잠긴 듯 다소곳하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뽀얗고 가냘픈 팔은 흐느적거리며 피아노의 건반 위에서 춤을 추었다.



감미로운 분위기 속에서 환상의 세계를 여행하다 음악회는 끝났다. 용찬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고 재빨리 화장실로 가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몰려드는 손님들을 헤치며 거울 앞에 서서 느슨해진 넥타이를 고쳐 맸다. 준비한 꽃다발을 거머쥐고 해연의 이름이 적힌 분장실의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응답했다.

분장실 안에는 구면인 해연 어머니와 이모, 몇 사람의 여인이 있었다. 용찬이 들어서자 제일 놀란 건 해연이었다.

"용찬이 오빠? 웬일이야?"

초대하지 않은 낯선 남자의 출현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해연은 용찬이 수줍게 내미는 꽃다발을 받아들고 좋아했다. 용찬은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러워 해연을 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아니, 오빠 어떻게 알고."

"몇 년 전 우리 집에 왔던 얌전이 아냐?"

안면이 있는 이모가 반겼다.

"맞아요. 오빠 친구."

"하이고 고등학생이 의젓한 신사가 되셨네."

용찬은 군기 빠진 제대 말년의 병장 모습으로 천천히 손을 올리려다 어정쩡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엄마, 용찬이 오빠 알지?"

화사하게 차려입은 귀부인 모친께는 공손하게 허리를 꺾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권용찬입니다."

"난 누군가 했더니 우리 집에 자취하던 학생이구만. 헌데 거 깍두기 머리에... 에고."

머리를 짧게 깎은 용찬을 건달로 생각한 어머니가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저 군인입니다. 어머님."

그러자 일행이 웃었다. 어머니란 소리를 해놓고 스스로 놀랐는데, 자신을 조롱하는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종필이 이 녀석은 무슨 일이 바쁜지. 같이 올라왔는데 인천에 볼일 있다고 여긴 못 왔어."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녀의 모습은 우아하면서도 신비로운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해연이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친구 두 분과 같이 저녁을 먹는 내내 용찬은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편치 못해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애먼 담배만 축냈다.



갑자기 그녀의 입술이 다가왔다
용찬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마주 댄 채 한참을 가만있었다
연달아 터지는 폭죽소리에 용찬의 가슴도 터지고 있었다




"오빠, 밀레니엄이 시작되기 전날인데 그냥 집으로 갈 순 없잖아?"

일행들과 헤어지고 나서 해연은 맥주 한잔하자며 용찬을 한강으로 인도했다.

폐선의 내부를 리모델링해 강가에 묶어놓은 선상 카페는 이미 젊은 남녀들로 만원이었다.

해연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오빠라고 부르면서도 어린애 다루듯이 자상한 그녀 앞에서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생각한 용찬은 괜히 위축되었다.

"왜 그간 연락 안 했어요?"

용찬은 마땅히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실없이 웃기만 했다.

"오빠 학교에 찾아갔었어요. 무슨 세미나 연수 갔다고 하던데?"

"아, 동아리 일로 바빠서 정신없었어. 미안해."

용찬과의 만남이 그리 좋은지 해연은 연신 미소를 흘렸다.

"오빠, 옛날 남대문 시장에서의 일 기억나?"

"무슨 일?"

"사람들 사이로 오토바이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어. 그때 오빠가 나를 잡아다니며 안았잖아. 순간적이었지만 기분이 묘했어."

"그랬나? 난 기억에 없는데."

"피이. 시침 떼기는?"

해연이 곱게 눈을 흘기며 용찬을 바라봤다. 그 황홀한 시선에 용찬은 아랫도리가 묵직해짐을 느끼며 화장실이 가고 싶어 일어섰다.



카페의 한쪽에 설치된 티브이에서는 곧 새해가 시작된다는 멘트가 들려왔다. 젊은 연인들은 곧 펼쳐질 불꽃놀이를 보려고 문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용찬을 보면서 해연이 핸드백을 들고 밖으로 나가자고 수신호를 보내왔다.

용찬은 한강 너머가 잘 보이는 배의 가장자리 통로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밖으로 몰려나와 붐비었으므로 해연은 용찬의 팔을 끼면서 밀착했다.

선실 밖에 설치된 대형화면에서 나오는 중계방송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문득 '아 지금쯤 고향 집에선 친지들이 모여 앉아 파제를 하겠구나'하는 생각이 튀어 나왔다. 용찬은 생각을 지우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중계 화면에 집중했다.



"잠시 후 카운트를 하겠습니다. 카운트가 끝나면 환성을 지르고 서로의 소원을 비십시오. 자 시작합니다. 텐, 나인, 에잇,.... 원, 제로!"

사람들이 카운트에 동참하여 '제로'를 소리치자 폭죽소리와 함께 불꽃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회면에서 2000년을 축하하는 문자와 웅장한 음악이 울리자 선상의 사람들도 환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한줄기 소리로 떠올라 널따란 화폭 위에 각양각색의 모습을 수놓고 명멸하는 불꽃의 모습은 잔잔한 강물 위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아름다움에 소리 지르며 감탄하는 사람과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 눈을 감고 기도하는 사람, 그 순간의 예술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 등 불꽃을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은 다양했다. 새 천년에도 변함없는 사랑을 약속하듯 연인들은 서로 껴안고 키스를 했다.

용찬도 펑펑 소리 내며 하늘에 그려지는 화려한 불꽃 그림에 넋을 놓고 있었는데 얼굴이 간지러움을 느꼈다. 어깨에 얼굴을 가만히 기댄 해연의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그녀는 감격에 겨웠는지 눈을 감고 울고 있었다. 용찬은 호주머니를 뒤졌으나 손수건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고 손으로 눈물을 닦으려 하자 갑자기 그녀의 입술이 다가왔다. 용찬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마주 댄 체 한참을 가만있었다.

연달아 터지는 폭죽 소리에 용찬의 가슴도 터지고 있었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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