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철의 목요담론]제주의 풍토와 추사예술(秋史藝術)

[양상철의 목요담론]제주의 풍토와 추사예술(秋史藝術)
  • 입력 : 2019. 07.11(목) 00:00
  • 김도영 수습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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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관조(觀照)되는 지금 시대에 제주는 천혜의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섬이다. 그러나 제주는 지정학적으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내륙과 단절된 절해고도였다.

제주인의 삶은 어땠을까? 한라산 자락 절벽에 붙어 거센 비바람 이겨내는 풀꽃처럼 힘들고 위태로웠다.

척박한 토질에서 땀 흘려 곡식을 얻고, 거친 바다에 몸담아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제주인의 성품은 자연히 투박하고 거칠며,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견고하고 끈질기다.

고난한 삶 속에 길들여진 이러한 특성은 한 마디로 역경을 이겨내는 도전정신이며, 그야말로 제주풍토가 만들어준 선물과 같은 것이다.

조선왕조 약 500년 동안에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유배자의 수는 무려 200여 명에 이른다. 그 중에는 지덕을 겸비한 정치가와 학자들이 많아 지방 유생들이 학문과 예술, 사상을 전수 받을 수 있었다. 유배객 중에 특히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9년 동안 대정에서 적거하면서 '추사체(秋史體)'와 '세한도(歲寒圖)'를 완성했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아는 사실이다.

흔히들 추사의 예술을 얘기할 때, 24세 되던 해 생부인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연경(燕京, 지금 北京)에 가서, 당시 금석학의 대가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에게 배웠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 청나라의 여러 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추사예술의 토대를 이루고 천부적 소질과 성실함으로 대성하였다고 통설적으로 단정한다.

성실함은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나 소질은 타고난 것이라서 배움으로 대신할 수 없다. 물론 실학과 금석학의 영향으로 추사가 일찍 눈 뜨고 많은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추사의 예술은 추사가 처한 운명이 만들었고, 그 운명이 제주에서 개척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풍토론적으로 보면, 추사가 이룬 예술은 제주풍토에 의한 추사의 정신적 산물이라 해야 맞는 말이다.

삶의 고통과 불안은 실존적 추상체(抽象體)를 만든다. 그러므로 추사의 미학은 아름답기보다는 추(醜)하고, 편안하기 보다는 불편한 괴(怪)의 숭고성을 갖는다.

추사체의 이러한 독특함은 제주 민간에 전승되는 이야기 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추사체의 형세가 급하고 험절한 것은 그가 즐겨 올랐던 적소(謫所) 앞 단산(簞山)의 괴벽한 모습에서 착상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도 추사예술에 대한 제주풍토의 필연성을 읽어 볼 수 있다.

추사에게 단산은 특별한 곳이었다. 그는 단산의 남쪽 편을 끼고 자리 잡은 대정향교에서 유생들을 가르쳤다. 강도순(姜道淳), 김구오(金九五), 박계첨(朴季瞻) 그 외에도 이름 모를 많은 제주 선인들이 그에게서 배움을 구했기에 추사의 예술은 이어졌을 것이다.

추사는 지금에 없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제주인의 가슴 안에는 언제나 '추사의 예술혼'이 살아 있다. 163번째 추사 탄신일(음력 6월 3일)을 보내며, 제주풍토와 추사예술의 각별함을 확인하는 일이 새삼스럽다.

<양상철 융합서예술가·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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