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22)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22)
  • 입력 : 2019. 07.25(목) 2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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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9-1. 바람에 스치는 별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양털처럼 깔린 사이를 비행기는 날고 있었다. 잠시 구름 속에 갇히는가 싶더니 이내 발밑으로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창밖으로 우뚝 솟아오른 한라산이 바다를 향해 뻗어 내린 자락아래 촘촘한 도시의 건물 숲이 보였다. 바다에 맞닿은 활주로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비행기는 무사 비행의 긴 한숨을 토해내며 멈춰 섰다.



황금색 테를 두른 웨딩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켜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주인공은 종필이었고,
아름다운 신부는 놀랍게도 왕리화였다.
용찬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양가 부모를 찾아뵙고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해연은 방학을 이용해 휴가를 얻은 용찬과 함께 제주에 내려왔다. 렌터카를 타고 계획한 대로 먼저 해연네 집으로 향했다.

혼잡한 공항에서 빠져나오니 그들을 반기는 것은 중앙분리대 화단의 키 큰 열대 나무들이었다. 제주는 이런 이국적인 풍경이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달리는가 했는데 금세 로터리가 나타나고 주변에 관공서와 높다란 건물들이 보였다.

삽화=고재만 화백



용찬이 능숙하게 핸들을 몇 번 돌리니 대룡반점이 나왔다. 한여름 점심시간이 지난 후라 얼핏 본 식당 안은 손님도 없이 한산했다. 맞은 편 리화의 집도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낯익은 동네에 들어서니 용찬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식당 앞을 지나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서니 해연네 집이 나왔다.



용찬이 차 트렁크를 열어 캐리어를 꺼내는데 해연이 웃으면서 말했다.

"긴장되지?"

용찬은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숨기고 눙쳤다.

"긴장은? 장인, 장모님이 어떤 표정일지 기대되는데?"

해연이 초인종을 누르자 곧 딸각하고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양 잔디 곱게 깔린 마당 한쪽 정원의 꽃나무들이 산들거리는 바람에 흔들리며 그들을 반겼다. 안채 문이 열리면서 해연 어머니가 나타났다. 몇 년 전 해연이 연주회 때 보았던 얼굴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어서들 와라. 먼길 오느라 고생들 했다."

"안녕하세요?"

용찬은 두 손에 가방과 짐을 든 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한참이나 용찬을 향해 시선을 쏘아대던 해연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네?"

해연이가 용찬을 쳐다보며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땐 군인이었잖아? 시꺼먼 촌놈이 서울물 먹어 때깔 난 거지."



거실에 들어온 후에도 연신 용찬을 응시하는 해연 어머니는 겉으론 태연한 표정이었지만 용찬과 시선이 마주치면 고개 돌리며 쓸쓸하게 웃었다.

"아빠는?"

"나가셨다."

"인사드리러 온다고 전화까지 했는데 공항에 마중도 안 나오고."

해연이는 못내 아버지의 태도를 못 마땅해 하며 투덜댔다.

"글쎄. 너희 아버지 아직도 선거에 미련을 못 버렸는지, 사람들 모인다는 소문 들리면 얼굴 내밀러 다니느라 바쁘단다."

"오랜만에 보는 딸은 안 중한가? 나 옷 좀 갈아입고 올게."

해연이 캐리어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가자 해연 어머니가 정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커피 줄까?"

"공항에서 마셨어요. 시원한 거 있으면 한 잔 주세요."

어머니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용찬은 찬찬히 거실을 살폈다. 커다란 고무나무 화분 곁 고풍스런 장식장에는 골동품으로 보이는 각양각색의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 탁자 위에 놓인 황금색 테를 두른 웨딩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켜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주인공은 종필이었고, 아름다운 신부는 놀랍게도 왕리화였다. 용찬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아니, 리화가 어떻게...'

해연 어머니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와 과일을 내오면서 액자에 코를 박고 있는 용찬에게 설명했다.

"응, 몰랐었구나. 종필이 결혼하고 애도 있어."

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과일을 깎으면서 심드렁하게 말했으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린 나이에 애도 있다니. 군대 있을 때 면회 온 날 리화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 오빠 보고 싶어서 지난 여름방학 때 오빠네 고향집 놀러 갔었어. 오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사랑에 목말라하던 이국 소녀가 어떻게 전혀 어울리지도 않은 종필과 결혼했을까? 종필과 금산인 왜 연락을 안 한 거지? 하긴 취업 준비 후론 전화 한 번 못했으니 내 연락처를 몰랐겠구나.'

용찬이 혼자 생각의 퍼즐을 끼워 맞추는데 해연 어머니가 해답을 주었다.

"독한 년이지. 그렇게 애를 지우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말을 안 듣더라고. 해연 아빤 중국 며느릴 들여서 가문 망신이라고 노발대발 했지만 애까지 낳았는데 어찌 하겠어?"

용찬은 생각에 잠겨 말없이 주스를 마셨다. 잠시 어색한 적막이 흐르는가 싶더니 해연 어머니가 하얀 속살이 드러난 사과를 조각내면서 말을 이었다.

"대룡반점 아주 부자 됐어. 우리 식당 건물 인수한 거 알어?"

"예. 소식 들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냐. 다른 부동산도 많아. 큰아들 배포가 보통이 아니더라구. 누이 결혼 때 외제차를 혼수로 주는 매부가 어디 있어? 중국에 중고차 무역하면서 엄청 돈을 많이 벌었나 봐. 사실 그 집안 돈이 없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결혼 막았을 거야."

마지막 말은 안 들었으면 좋았겠는데 그렇게 합리화를 해서라도 집안의 우월함을 나타내고 싶은가 보다 생각했는데, 곱씹어 보니 가난한 용찬 보고 새겨들으란 소리였다.

해연 어머니는 말을 해놓고 멋쩍다고 생각되었는지, 포크로 사과 조각을 찍어 용찬에게 권했다.

"자. 단맛이 덜 들었지만 먹을 만 해."

용찬은 사윗감을 생각해주는 단성이라고 생각하며 포크를 넘겨받아 한 입 베어 물고 우적우적 씹었다. 해연 어머니는 화제를 바꾸려고 가져간 선물 세트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아이고 저런 비싼 것에 왜 생돈을 써?"

분위기가 어색해지는데 해연이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화사한 의상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휴대 전화기를 귀에 대고 통화를 시도하다가 포기하며 불평을 털어 놓았다.

"전화도 안 받으시네? 아무리 바빠도 딸 전환데?"

"그럴 사정이 있는 거겠지. 자 과일 먹어라."

집요하게 다그치는 해연에게 쩔쩔매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용찬은 포크로 사과 한 조각을 찍어 올려 해연에게 내밀었다.

"이제 막 왔으면서 뭐가 그리 급해."

어머니는 용찬의 응원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느긋하게 기다려 이것아. 날씨도 더운데, 요즘 가물어서 더 덥다. 참 내 정신 좀 봐. 수박 가져온다는 걸."

어머니는 딸의 툴툴거리는 볼멘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듯 일어섰다.

"됐어. 우리도 바빠. 오빠네 집도 가야 해."

"그래 그럼. 저녁은 집에 와서 먹어라. 네가 좋아하는 잡채랑 갈비 준비해 놓을 테니."

어머니는 켕기는 게 있는지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휴식터였던 폭낭(팽나무) 그늘이 두어 발 드리워진 곳에 용찬의 본가가 있었다.
그렇게 높고 컸던 나무였는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았는지 초라하게 보였다.


고향으로 가는 해안 길은 제대를 하고 잠시 들렀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곁에 앉은 해연의 옷차림과 향수 냄새 때문인지 용찬은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엔 관심 없고 신혼여행 온 듯 마구 마음만 설렜다.

하귀에서 시작된 해안선의 바다는 햇살을 받아 시시각각 다양하고도 고혹적인 색상으로 이국적 풍경을 연출해냈다. 해연은 해안 길 구비를 돌 때 마다 색다르게 펼쳐지는 광경에 연신 '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밀려드는 파도의 포말에 시선을 빼앗겼던 해연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머, 내 고향이면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 봐."

"내가 곁에 있어서 그래."

해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용찬을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경치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거 거든?"

해연은 용찬의 옆구리를 두 손가락으로 잡아 쥐고 사정없이 비틀면서 말했다.

"아이고, 데려와 줘서 눈물 나도록 고맙네요."



차를 고향집 어귀의 담벼락 옆에 정차시키고 골목길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의 휴식터였던 폭낭(팽나무) 그늘이 두어 발 드리워진 곳에 용찬의 본가가 있었다. 그렇게 높고 컸던 나무였는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았는지 초라하게 보였다. 돌담으로 이어진 올레를 따라 이문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올망졸망 비틀리며 마르는 미역들이 마당 한가운데서 그들을 반길 뿐 집안은 고즈넉했다.

제주의 집 구조는 안꺼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로 되어 있다. 바깥채에 살던 큰아들 손자들이 장성하면 안채를 내주고 부모는 바깥채에 산다. 그러나 한 울타리에 살아도 독립경제체제에 밥도 따로 해 먹는다. 그래도 맛있는 반찬이 생길 때는 나눠 먹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니 서로 의지가 되는 장점이 있다.

"어머니!"

용찬이 집안을 향해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어릴 때 많은 시간을 보냈던 바깥채 할머니 방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용찬이 시내로 옮기자 병찬이 할머니 맞은 편 방을 차지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서귀포에 근무하는 병찬의 방 문을 열었다.

책상 위에는 용찬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 어머니와 함께 찍은 오붓한 가족사진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동생과 함께 놀았던 유년의 기억들이 휙 하고 스쳐 지나갔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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