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18)과거제도의 겉과 속(1)

[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18)과거제도의 겉과 속(1)
당대 시인 두보도 낙방… 송대엔 진사 급제 골몰 무인은 뒷전
  • 입력 : 2019. 08.08(목) 00:00
  • 김경섭 기자 kks@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1500년 넘는 인재 선발제도
공평성·공개성·공정성 갖춰
진정한 의미 과거 수나라 때
양귀비에 빠졌던 당대 현종 때
언로가 될 인재 선발 막기 위해
몇 단계 시험 등 과거 악용 사례


과거제는 세계에서 유래를 살펴보기 힘든 탁월한 인재 선발제도로 1500여 년의 역사를 지녔다. 중국은 이를 자랑할 만하고, 세계는 찬사를 보낼 만하다. 프랑스 중농주의 경제학자인 케네(Quesnay, 1694-1774)는 '중국의 전제주의'라는 책에서 중국의 문관고시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실제로 유럽에서 프랑스가 최초로 1791년 문관 선발시험을 시행하고 영국은 1853년에 확대 시행했으니, 1000여 년 전인 고려 광종光宗 시절 후주後周 쌍기雙冀의 건의로 과거제를 도입한 우리나라보다 훨씬 늦었다.

과거시험장인 공원(貢院).

중국의 과거제도는 다음 세 가지 특징을 가진 가장 오래된 선관選官 제도이다. 첫째, 공평성. 노복이나 여성은 제외되었으나 일반 평민들도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다. 둘째, 공개성. 전국에 고시告示하고 선발 기준과 인원 및 합격자를 공개했다. 셋째, 공정성. 과거는 주로 예부禮部(초기에는 이부吏部)에서 엄격한 규칙에 따라 주관했다. 지공거知貢擧(시험관)는 고시 공고와 동시에 공원貢院(과거 시험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자신의 친인척이 응시할 경우 시험관을 맡을 수 없었다. 고시생은 시험장에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고, 부정행위가 발각될 경우 처벌을 받았다. 물론 역대 왕조가 이런 원칙을 절대 준수했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원칙은 분명했다. 무엇보다 치국과 인재선발이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어 황제의 인재 선발에 대한 욕구가 절실했고, 당시 지식인, 학생들에게 과거 응시는 필생의 목적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당 현종 이융기(李隆基).

중국의 인재 선발제도는 주나라 향거이선鄕擧里選을 시초로 본다. 마을의 원로나 족장이 현명하고 능력을 갖춘 이를 선발하여 지방장관을 거쳐 중앙으로 보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당시 세경세록世卿世祿 제도 하에서 인재 자체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일부 귀족계층으로 제한되었으니 보편적인 인재 선발이라고 할 수 없다. 한나라의 찰거察擧나 위진魏晉의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는 나름 인재 선발에 공을 들였으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선진시대 세경세록 제도로 복귀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양귀비 양옥환은 원래 현종의 18번째 황자인 이모의 처였다.

진정한 의미의 인재 선발 방식으로서 과거제도는 수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7년(587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에 중정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을 폐지하고 주도州都를 별도로 설치하여 추천토록 하고, 중앙에서 직접 관리로 임명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기나 구술시험을 상설하여 지속적으로 관리를 선발하기에 수隋(581-619년)의 수명이 너무 짧았다. 게다가 양견楊堅(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煬帝는 각급 문관들에게 인재를 추천하라는 조서를 내리고 진사과가 포함된 10과科로 선발토록 했는데, 이는 기존의 찰거를 그대로 운용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과거제도는 당대에 지방에서 시험을 실시하여 합격자를 선발하는 방식이 정착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무엇보다 기존의 선발 방식과 다른 점은 타천他薦, 즉 향리나 지방 관서에서 추천하는 방식 외에도 자거自擧나 자진自進 등 자신이 스스로 추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다시 말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는 공평성을 확보했다는 뜻이다.

당대 전시(殿試) 그림.

그렇다면 주로 누가 과거에 응시했나? 당대의 경우 생도生徒와 향공鄕貢이다. 생도는 국자학(진晉 무제 때 설치)이나 태학(한 무제 때 설치), 사문학四門學(북위北魏 때 설치) 등 관학의 학생들이고, 향공은 민간의 사숙私塾에서 공부하거나 독학한 사람들이다. 당연히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나 입학하는데 신분적 차별이 있을 뿐만 아니라 8품 이하의 자제나 민간의 자제들은 율학律學, 서학書學, 산학算學 등 이른바 전문학교밖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게다가 가문의 특권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학문보다 놀고 마시는데 열심이었다. 굳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잘난 조상 덕분에 음보蔭補로 관리가 될 수 있는데 뭘 그리 열공하겠는가?

과거 시험장 내부 모형도.

당대 시인 위응물韋應物은 명문세가 출신인 덕분에 과거와 상관없이 15세에 현종의 숙위宿衛로 임명되어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면서 황제가 여산 화청궁에서 양귀비와 밀회를 즐길 때도 따라갔다. 그러다 현종이 죽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후회막심後悔莫甚!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의 시 '봉양개부逢楊開府'에서 당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

"젊어 명황明皇을 모실 때, 황제의 은총만 믿고 무뢰한無賴漢이 되었다. 동네 깡패로 범법자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아침부터 도박판에 끼어들고, 밤이면 동쪽 마을 계집과 정을 통했다. 사례교위司隷校尉조차 감히 나를 체포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황제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산에 눈바람 부는 날이나 황제께서 장양궁에서 수렵하실 때면 한 자도 모르는 무식꾼처럼 술이나 마셔대고 미련한 짓을 했다. 황제께서 돌아가시니 초췌한 모습으로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았다. 글을 읽는 일이 너무 늦기는 했으나 붓 잡고 시를 짓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꿈에도 그리던 장원급제.

당대는 과거가 정기적으로 실시되기는 했으나 인재 선발이 엄격한 것은 아니었다. 양귀비에 빠진 현종은 정사에 관심이 없었다. 하여 구밀복검口蜜腹劍(입에 꿀 바른 것처럼 말하지만 뱃속에 칼을 품은 듯 음해할 생각이 있음)으로 유명한 이림보李林甫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는 19년 동안 재상으로 권력을 농단하면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옥사를 일으켜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 조정에서 언로를 막으려면 인재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현종이 천하의 인재를 선발하라고 하자 군현의 장관들이 인재를 추천하면 상서성에서 재차 시험을 보아 명실상부한 인재를 뽑겠다고 했다. 하지만 경사에서 본 시험에서 합격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림보가 현종에게 찬사의 말을 올렸다. "영명한 황제가 계시니 민간에 남은 인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당시 시험에 떨어진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당대의 위대한 시인 두보杜甫이다.

송대는 그래도 조금 나았다. 인문학이 최고조로 발흥했던 송대는 문관의 시대였다. 구양수歐陽脩, 소식蘇軾, 왕안석王安石 등은 모두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과거를 통해 조정에 들어온 이들이다. 송대 과거는 기존과 달리 세 단계였다. 주현州縣에서 보는 해시解試(장원은 해원解元), 중앙에서 치는 성시省試(성원省元), 그리고 마지막은 황제 앞에서 보는 전시殿試였다. 전시에 급제한 이를 장원壯元이라 불렀다. 송대의 시험과목은 당대의 수재秀才, 명경明經, 명법明法, 명서明書, 명산明算, 진사進士 등 다양했지만 명경과 진사가 중요했고, 특히 진사과가 과거의 꽃이었다. 명경은 말 그대로 경전을 외우면 그 뿐이지만 진사는 창의적인 문장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진사과는 급제하기가 어려워 "명경과는 30세도 늦은 편이고, 진사과는 50세도 빠른 편이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진사과는 송대에 재상과宰相科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모든 재상이 진사과 출신이었다. 송대의 사인들은 오로지 진사급제를 위해 불철주야 학문에 열중했다. 무인들은 한 구석으로 팽개쳐졌다. 북방에서 굴기한 요遼가 침공한 후에도 진사출신 문인들이 정사를 좌지우지했다. 결국 북송은 망하고 남송시대가 열렸다.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3181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