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주도민 학살 명령을 거부한다"

"우리는 제주도민 학살 명령을 거부한다"
주철희 박사, 18일 4·3도민연대 대상으로 '순례'
봉기 시작 14연대부터 참혹한 민간인 학살지까지
희생자 묘비는 일부 유족 반발로 대리석에 막혀져
"특별법 제정도 안된 여순항쟁 현실… 발굴이라도"
  • 입력 : 2019. 10.18(금) 20:01
  • 송은범기자 seb1119@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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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6월 14일 제14연대 제1기 하사관 후보생 기념 사진. 주철희 박사 제공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해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을 거부한다."

 제주4·3이 낳은 또 다른 비극인 '여순항쟁'의 참혹한 실체가 드러났다.

 18일 역사학자인 주철희 박사는 4·3도민연대와 수형생존인 등 제주에서 온 27명을 대상으로 '여순항쟁 유적지 탐방'을 진행했다. 전날 제주4·3도민연대가 순천대학교에서 '제주4·3, 여순항쟁 학술토론회'를 개최한 뒤 전남 여수를 방문함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전남 여수시에 위치한 제14연대 주둔지에서 주철희 박사가 설명을 하고 있다. 송은범기자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항쟁의 도화선이 된 국방경비대 14연대 주둔지였다. 제주4·3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 1948년 10월 19일 군인 약 1400명이 봉기한 곳이다.

 1400명 가운데 집행부라고 할 수 있는 800명은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 여수역을 향했고, 나머지는 여수나 광양 등 각자의 고향으로 흩어졌다.

 군인의 봉기는 미군정에서 이승만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불만이 고조됐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호응·지지하면서 여수와 순천, 구례, 광양 등으로 불길처럼 확대됐다.

 하지만 정부는 곧바로 계엄령이 선포하고, 전국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는 토벌작전을 펼치면서 민간인 1만여명이 빨갱이로 내몰려 목숨을 잃었다.

 주철희 박사는 "14연대가 봉기를 일으킨 이유는 4·3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김익렬이 14연대장으로 있으면서 관련된 내용을 신문에 기고하고, 동료들에게도 알리면서 비롯됐다"며 "여기에 군 주요 지휘관이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는 점도 이들이 불만을 품은 주요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민간인 125명이 총살돼 불 태워진 형제묘에서 주철희 박사가 설명을 하고 있다. 송은범기자.

다음으로는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여수시 만흥동 '형제묘'였는데, 1949년 1월 13일 인근 국민학교에 수용됐던 민간인 125명이 총살, 불태워진 곳이다. 이후 불태워져 시신을 찾을 수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며 묘를 쓰고, 비석을 세웠다. 마치 제주의 '백조일손지묘'를 연상케 한다.

 주 박사는 "유족 가운데는 아들이 총살되는데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지켜본 어머니도 있었다"며 "당초 비석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기재됐지만, 여순항쟁에 연루된 사실을 꺼리는 일부 유족에 의해 대리석으로 가려져 버렸다"고 말했다.

 이어 "발굴 작업도 논의가 됐지만 일부 유족들의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며 "형제묘는 특별법 조차 제정되지 못한 여순항쟁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푸념했다.

 이에 대해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대표는 "제주는 4·3평화공원 봉안관이라는 곳이 있어, 희생자를 안치하고 있다"며 "유해 발굴과 안치는 국가폭력의 진상규명,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참가자들은 형제묘와 인접한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를 방문, 묵념을 하며 넋을 위로했다.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송은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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