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병의 목요담론] 박물관 정원에서 숨 쉬는 소중한 것들

[김완병의 목요담론] 박물관 정원에서 숨 쉬는 소중한 것들
  • 입력 : 2019. 11.07(목)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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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근무하는 곳에 빨간 섬하르방이 있다. 박물관 정문에 서 있는 도지정 문화재인 돌하르방과는 다르게 쇠를 이용해 만들었다. 돌하르방도 아니고 쇠하르방도 아니다. 사진 배경으로 으뜸이지만 그냥 버스에 탑승하는 사람도 많다. 여기에 서 있게 된 사연이 있다. 수년전 1998년과 2001년에 제주시 오라관광지구에서 '제주세계섬문화축제'가 열린 적이 있었다. 당시 제주 관광의 세계화에 기여하기 위해 개최했으나, 축제의 지속성, 정체성, 접근성 등의 논란 그리고 적자 행진에 밀려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그 이후 2017년에 다시 축제 재현을 시도하다가, 도민공감대 및 참신성 부재, 막대한 예산, 기존 축제들과 차별성 등의 어려움으로 추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제주 출신 한명섭(1939~2004) 작가의 작품인 섬하르방은 두 번째 축제 때 공모에 당선됐으며, 사방 어느 쪽으로 봐도 돌하르방의 형상을 띄도록 해 마치 움직이는 듯 신비감을 준다. 섬문화축제가 중단되면서, 축제장 입구에 설치됐던 섬하르방은 그야말로 외로운 신세로 전략했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흉물로 변신할 뻔했다. 이전 비용과 유지관리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2005년에 박물관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입장권을 들고 박물관 마당으로 걸어오다 보면, 산지천을 낀 팽나무 정자 옆에 또 다른 조형물이 있다. 양중해(1927~2007) 시인의 '해녀들의 노래' 시비석을 보다보면 파도소리와 숨비소리가 저절로 들린다. 꽃 같은 청춘을 마다하고, 소중이를 입고 바다 속을 헤매며 가족과 고향을 책임져야 했던 해녀들의 가난한 시절을 더듬어 보게 한다. 사람들이 팽나무 정자 아래에서 정겨운 대화를 나누는 광경은 마치 해녀들이 불턱에 앉아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외에 박물관 마당과 정원에는 직박구리가 늘 찾는 물허벅상을 비롯해 용담동 고인돌, 정주석과 정낭, 포토존 돌하르방, 수눌음석, 할망당, 돗통시, 참항, 선정비 등 제주사람들의 일생과 제주인의 정신을 담은 소중한 유물이 많다. 또한 화산탄, 압수 용암석, 기념식수, 재래감귤, 담쟁이와 모람, 야생화 등 제주의 자연과 사계절을 감상할 수 있는 신비한 자연 자원들도 가득하다. 특히 박물관 정원을 빛내는 야생화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도 웃음과 기쁨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 동백꽃과 수선화가 지고나면 벚꽃, 녹나무꽃, 문주란꽃, 배롱나무꽃 그리고 11월에 접어들면서 박물관은 노란 털머위꽃의 향기로 정신이 아찔하다.

박물관 정원은 좀 더 여유를 갖고 둘러보면, 진귀한 보물로 가득한 또 다른 풍경이다. 나태주 시인이 예찬한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아야 예쁜 풀꽃'처럼 박물관 정원이 그런 공간이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잊고 있었을 뿐이다. 늘 태양과 하늘이 돌보고 있어서 사람들이 소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박물관의 정원은 더 잘 가꾸어야 한다. 섬하르방도, 돌하르방도, 해녀도, 털머위도 그걸 원한다. 운치와 사연 그리고 삶의 기록과 흔적들로 채워진 박물관 정원은 유물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더 빛나야 한다. 비록 서 있는 위치와 키가 다르지만 섬하르방과 돌하르방이 애물단지가 아닌 보물로 자리매김 돼야 한다. <김완병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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