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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한라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버스커, 버스커-이은향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입력 : 2020. 01.0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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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머가 현란한 손놀림을 펼치자 흥이 폭발했다. 혼을 불태울 듯 최고조에 오른 샤우팅은 야수의 포효마냥 허공을 발기발기 찢어놓았다. 리드보컬인 빨강머리와 일렉 기타의 퍼스트가 쌍으로 머리를 풀어헤쳐 헤드뱅잉을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한층 더 고조되었다.

빨강머리는 다섯 옥타브를 아우르는 실력파로 목청을 긁어 대는 그로울링 창법을 즐겨 사용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성대결절로 이어질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해지곤 한다. 게다가 그는 지나치게 외모를 의식한 나머지 40도를 육박하는 폭염에도 가죽재킷과 가죽바지를 포기하는 법이 없다. 주렁주렁 매달린 이어링에 코에 장착한 피어싱까지 그를 보고 있으면 세상의 어수선함은 전부 끌어모은 듯했다. 그의 목에 걸린 금속의 펜던트조차 꽤 무거워 보였다.

락이라곤 데이비드 보위 노래만 듣던 내게 하드락은 정말이지 공사장의 소음과도 다름 없었다. 공연 전에 팀의 리더인 퍼스트가 나서서 곡 소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 가사는 답답하기만 했다.

마침내 괴성인지 비명인지도 모를 연주가 끝이 났다. 버스킹 첫날 퍼스트가 자신들을 '불파'라고 소개하면서 풀어쓰면 '불고기 파티'라고도 말해주었다. 밴드 명을 그렇게 지은 연유에 대해선 설명을 따로 하지 않았지만 공연 후에는 자주 불고기를 먹으러 간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세상에서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는 소문으로 떠도는 법이었다. 나는 인터넷 사이트를 유영하며 그들에 관한 정보를 캐고 다녔다. 한때는 팬 카페가 7천 명에 육박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멤버 중에 여자 싱어도 있었다는 사실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낸 거였다. 불파는 최근에 SNS를 시작했는지 버스킹 사진도 여러 장 게시해놓았는데, 그중에는 내 모습이 찍힌 사진도 있었다. 허락도 없이 올렸으니 초상권이라도 운운하며 따져야 할 판이지만 오히려 나는 그들과 한통속이 된 듯한 결속력을 느꼈다.

솔직히 두 달 전에 그들이 짧은 그림자를 매달고 역 광장에 나타났을 땐 하늘에서 날아온 운석에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들의 전매특허 같은 하드코어 한 선율과 거침없는 사운드, 폭발적인 무대 퍼포먼스와 시각적인 효과를 염두에 둔 글램 록 스타일의 비주얼은 내가 감히 흉내 내지도 못할 경지였다. 솔직히 저 정도의 에이스가 왜 이 작은 도시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특히 빨강머리가 담배를 꼬나문 채 한숨을 내뱉을 때면 의구심은 더 커졌다.

그림=자경



    두 달 전 그들이 역 광장에 나타났을 땐
    운석에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해졌다
    하드코어 한 선율과 거침없는 사운드
    왜 작은 도시에서 시간을 죽이는지…
    빨강머리를 보며 의구심은 더 커졌다


불파의 공연이 끝났는데도 나는 버스킹을 이어갈 마음이 사라졌다. 펼쳐놓은 기타케이스 안에는 퍼런 지폐 몇 장과 은색의 동전들이 나뒹굴었다. 어떤 날은 작은 팁에도 위로가 되었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버스킹을 시작한 지 고작 십 분이었는데 느닷없이 불파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불편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 호기로운 미소를 지어보지만 미간에 드러난 불안한 기색까진 어쩌지 못했다. 배려라곤 전혀 없는 그들의 횡포에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들을 향한 마지막 관용조차 임계점에 이르렀다.

빨강머리가 내 옆에 쪼그려 앉더니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들었다. 그가 라이터에 불을 댕기자 연기가 내 쪽으로 와락 밀려들면서 기침이 나왔다. 그런데 그는 사과는커녕 친절을 베풀듯이 자신의 입에 물고 있던 꽁초를 빼내어 한 모금 빨래요, 하며 내게 권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신경질적으로 쏘았다.

기침하잖아요.

유난은. 여자 싱어들도 잘만 피우던데 뭘. 이참에 배워 봐요.

싫다니까요. 그리고 피차 상도는 지켜야죠. 자리를 가로챈 건 그렇다 쳐도 상대의 버스킹 시간쯤은 배려해줘야죠. 이건 뭐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대니.

거참, 공공시설에 니 구역 내 구역이 어딨다고. 먼저 찜하면 임자지. 우리 상관 말고 아무 때나 노래해요.

스피커의 볼륨을 최고조로 올려 고함을 처대는데 발라드를 부르라고요?

나는 콧등을 찡그려 시비조로 되받았다. 빨강머리가 내 쪽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듯했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그의 손을 툭 쳤다.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그때부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구차한 변명이라도 늘어놓아야 할 분위기였다.

사실 아버지가 담배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아, 그런 사연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난 또 내가 싫어서 그런 줄 오해했네.

빨강머리가 피우던 담배를 구둣발로 비볐다. 그의 얼굴이 벌게지고 있었다.



남향의 건물은 이른 아침부터 내리쬐는 빛발로 후끈거렸다. 애써 창문을 등지고 돌아눕는다. 해도 격자창으로 비집고 들어온 빛을 피할 순 없다. 창 너머 거리에도 투명한 빛이 빗발쳤다.

차도에는 끝없는 출근전쟁이 펼쳐진다. 네거리 신호등은 푸르고 붉은 빛으로 운전자의 마음을 저울질한다. 황색불로 바뀌자 차들은 잠시 후에 들어올 빨간 불을 의식해서인지 가속으로 내닫는다.

시선은 어느덧 미용실 간판으로 옮겨간다. 녹이 슬고 금이 간 간판의 뒷면에는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쌓여 있다. 마치 우중충한 현실에 맞닥뜨려 속절없이 삭아 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듯이. 서른 줄에 접어든 지금, 나는 아직도 불확실한 미래와의 경계에서 방황 중이다. 서른이라는 단어가 지닌 질감의 의미, 또 그에 합당한 부피를 채울 기회조차 찾지 못한 채. 마냥 자유를 동경할 순 없겠지만 마리오네트처럼 줄에 묶인 삶은 용납할 수가 없다. 피에로처럼 속도 없이 웃겨야 하는 삶은 더더욱 원치 않는다. 그래도 어디든 희망은 있기 마련이다. 어둠이 차오르면 저 낡은 간판도 인근을 통틀어 가장 눈부시게 빛을 내듯이 나에게도 황홀한 데뷔가 찾아올지도 모를 테니까.

창문으로 스며든 배기가스에 속이 매슥거린다. 도로변에 살자면 이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야할 일이다. 2년 전, 이 집을 보러왔을 때 나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 같아 몹시 감격에 겨웠었다. 20세기 중반에 지어졌을 허름한 건물은 이태 전 지진이 휩쓸고 간 후 피사의 사탑처럼 삐딱해져 오랜 시간 방주인을 찾지 못했다. 해가 바뀔수록 월세는 점점 다운되었고, 나는 반값에 계약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주변의 반응은 신통찮았다. 동정 가득한 눈빛으로 건물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 계약금을 포기하고서라도 다른 집을 구해야 한다며 입을 모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던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도. 다행히 2년째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어느새 오래 살았던 내 집처럼 편안해졌다.

주방기구라곤 싱크대에 딸린 개수대와 그릇을 올릴 선반이 전부였다. 월세에 비해 이 정도 옵션이라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가스레인지가 필요하지만 LPG통 설치는 절대 불가라고 주인은 계약서에 못을 박았다. 기울어진 옥상 때문이었다.

머그잔에 스틱용 커피믹스를 탈탈 털어 넣고는 전기 포트로 끓인 온수를 부었다. 빈 커피봉투로 솔솔 저은 후 한 모금 들이키자 목울대가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고온다습한 기온에 뜨거운 커피는 다소 부담스러운 법이었다. 그럼에도 고집하는 건 열기로 인해 종국에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한 모금씩 들이킬 때마다 뱃속에서는 통증이 일어났다. 통증은 쾌감으로, 쾌감은 카타르시스를 동반했다.

이 절묘한 타이밍에 빠질 수 없는 건 선율일 것이다. 나는 식탁으로 가 MP3플레이어의 전원을 켠다. FM 주파수를 타고 솔베이그의 노래가 흐른다. 메조소프라노의 목소리는 휘핑크림처럼 달콤하고 부드럽다.

늘 그렇듯 평온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느닷없는 문자알림에 커피 맛은 달아나고 맥박이 빨라진다. 주인여자는 말일이면 어김없이 집세와 관리비 내역서를 문자로 전송한다. 엄마에게 또 손을 벌려야 하나. 몇 년 사이 엄마의 분식가게도 매출이 반 토막이 났다. 그런 탓에 엄마의 잔소리가 길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원인과 결과를 아버지 탓으로 돌렸다.

노래는 언제 때려 칠겨? 니 애비처럼 평생 애미 등골만 빼먹고 살참이여?

내 기준엔 아버진 실력 있는 뮤지션이었으므로 존경받기 마땅한 분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버지를 평할 때마다 마누라 등골 빼먹은 철천지원수요, 백수남편의 표본으로 매도했다. 철이 들면서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진 않았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나는 버석한 식빵쪼가리를 입안에 우겨넣은 채 앰프와 마이크가 든 장비가방을 챙겨 현관을 나섰다. 인터넷 검색 결과 포털 검색어에 낮 최고 기온이 40도라고 떴다. 모르긴 해도 바짝 달구어진 지열의 온도는 50도를 육박할 것이다. 차비를 아껴볼 심산에 걷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역 광장까지 도보로 삼십 분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땡볕에는 세 시간처럼 지루했다.

역 광장에 가려면 재래시장을 지나야 하는데 어물전은 필수코스였다. 여름철에는 부패의 속도도 빨라져 어물전 특유의 비린내와 쿰쿰내가 숨을 압박했다. 이런 조악한 환경에도 버스킹을 포기하지 않은 건 스스로 정한 틀을 깨고 싶지 않은 나의 신념 때문이었다. 시답잖은 자존심이라고 해도 그만이다. 그나마 버스킹이라도 붙잡고 있으니 노래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고, 가수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이니까.

그림=자경



    저들이 거친 감성의 곡 선호한다지만
    헤드뱅잉만 강요 않으면 신선한 조합
    역 광장 데모가로 풀려버리긴 했지만
    이참에 아버지 불러내고 싶은 욕심도
    "너를 느껴, 기억을 걷는 동안에도…"


불파와 지리멸렬한 신경전을 벌이기 전까진 일상은 모노톤의 정물화처럼 잔잔했다. 버스킹은 선선해진 저녁시간에 잠깐이면 되었고, 낮 시간엔 노래연습을 하거나 작곡노트를 끄적였다. 타인의 간섭을 받을 것도, 기한을 종용당할 염려도 없는 뮤즈로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살고 있었는데 불파의 출현 이후론 삶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들이 저녁 시간을 차지하게 되면서 나는 한낮으로 밀려났다. 땡볕에 관객 모으기도 쉽지 않았다. 역 광장을 배회하는 노숙자나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이 자리를 채워주면 다행이겠지만 그들도 발라드는 지루해했다.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건 스무 살이 지나고서였다. 여고를 졸업하고도 대학진학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라 엄마에게 보컬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말도 못 꺼냈다. 연습이라 치면 인터넷 동영상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루브와 안무도 그런 방식으로 익혔다. 서른 전까진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유명 기획사를 뻔질나게 쫓아다녔다. 심사위원들은 하나같이 한 소절만 듣고도 눈빛이 싸늘해졌지만.



스물넷의 어느 여름날,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가 황당한 제의를 했다.

니도 베짱이처럼 빈둥거리지만 말고 밥벌이 좀 해라. 듣자하니 길 건너편 새마을금고 2층 의료기업체서 노래자랑 한다 카대. 일등하면 40인치 벽걸이 TV를 부상으로 준다는데 니가 타오기만 하면 시세로 따져 현금으로 반 주꾸마.

신청자가 죄다 노인이라는 말에 나는 솔깃했다. 교체시기가 한참 지난 안방 TV를 떠올리면 도전할 명분은 충분했다. 낡은 모니터에는 수십 개의 가로줄이 희번덕거려 드라마라도 볼라치면 눈이 아파서 이십 분도 보지 못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청중의 호응과 상이 비례하지 않다는 걸, 그러니까 상의 우선순위가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노래자랑은 미끼였으며 업체의 궁극적 목표는 수상자들을 타깃으로 한 의료기 판매에 있다는 것도. 내 이름은 맨 마지막에 불리었다. 인기상이라고 했지만 최연소 참가자라 격려차원에서 뽑았다는 심사평이 뒤따랐다. 인기상은 나 말고도 2명이나 더 있었는데, 순전히 춤을 잘 춰서 뽑힌 거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부상으로 받은 전기 프라이팬을 주먹으로 치며 툴툴댔다.

심사위원들이 막귀 아녀? 그 노인네들이 우째 나보다 낫단 말이고? 음정, 박자 무시에 오뉴월 엿가락 늘어지듯 염불을 읊어대던데.

니 말 틀린 거 없다. 모지리 귓구멍에 솜 털어 막았는갑다. 내 귀에도 니가 젤로 낫더라. 가만 보니 니가 아부지를 쏙 빼박았어야.

울 아부지도 노래 잘했나?

하머, 가수였제.

뭐? 근데 와 여태 말 안했노.

무명가수 주제에 뭐 자랑거리라고. 좀 안됐긴 하지만서도.

와?

목이 탈난 후론 후두암 걸린 노인네처럼 쉰 소리만 캑캑거렸제. 작곡에 미쳐 살 때는 골방에 처박혀 너구리 굴 속처럼 담배 연기만 자욱하더니 결국 폐도 잘랐제.

엄마의 눈이 속수무책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원수라고 곱씹을 때는 언제고 일말의 정이라도 남았나. 꽃피는 봄날 다 지나가고 궁상맞게 늙어갈 땐 까닭이 있을 법도 한데. 어쨌거나 그 생각의 끝자락엔 나 때문인가 하는 일말의 죄책감이 깃들었다. 젊을 적 엄마는 지역의 이름난 명문여고 출신에 인물도 반반해 껄떡대는 사내들이 꽤 많았다. 그중에는 부동산과 현금을 쌓아둔 변변한 홀아비들도 더러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거듭 불러보지만 그는 고독한 수행자였을 뿐. 그런 아버지로 인해 엄마가 감당했을 외로움에 내가 너무 소홀하지는 않았을까.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터져 나온다. 이따금 뒤돌아서서 훌쩍이는 엄마의 눈물을 간과한 것도, 또 그 눈물의 의미를 모른 체한 것도 미안할 따름이다. 설령 그런 감정이 남편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가수였다는 게 나에게는 큰 희망이 되었다. 가수로 성공하자면 엄마를 닮았으면 더 좋을 뻔했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아버지를 빼박았다. 뾰족한 턱과 쌍꺼풀 없는 길쭉한 눈매는 인상 사납다는 소릴 종종 듣게 했으며 결정적으로 약한 성대는 내 발목을 잡았다. 결국 노래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나 또한 성대결절 판정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단골로 드나들던 음악서점에 알바로 일하게 된 거였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각 출판사에서 택배로 배송된 책들을 책꽂이에 분류하고, 거래처 주문서에 열거된 책들을 찾아 묶음포장을 해놓으면 나머진 사장이 알아서 처리했다. 그는 오후 1시가 되면 포장한 책들을 싣고 거래처로 떠났다. 거래처라고 해봤자 소규모 동네서점이나 음악 학원 등이었고, 사장은 그곳을 상대로 도매가에 책을 납품했다.

사장이 떠나고 나면 나는 퇴근 전까지 매장을 정리하거나 책을 직접 사러오는 손님들을 상대했다. 서점이 워낙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 손님은 많지 않았다. 몸이 편하면 타성에 젖기 마련이 듯이 나는 반복된 일상에 조금씩 싫증이 났다. 오선에 걸린 콩나물은 더는 내게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일상은 빽빽한 콩나물시루에 갇힌 듯 갑갑해졌으며 비 오는 날엔 바닥으로 내꽂히는 빗줄기가 숫제 4분음표처럼 징글징글해 보였다.

사장은 사십 대 후반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자글자글한 얼굴주름으로 짐작해도 환갑은 훨씬 넘은 중늙은이었다. 그도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짠밥 때문인지 성격이 꼬장꼬장하니 일처리는 깔끔했다. 하지만 누구나 단점은 있듯이 어리바리한 면모도 없진 않았다. 이를테면 영리한 척은 혼자 다하는 것 같아도 제 꾀에 넘어가는 토끼처럼 실속이 없었다. 도서정가제가 정착된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그는 종래의 관례를 버리지 못해 여전히 거래처에다 삼십 퍼센트의 커미션을 떼 주었다. 그러니까 죽어라 뛰어도 기름 값이 안 나온다는 그의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형 출판사의 텃새에 밀려 반품도 못 한 재고가 수두룩했는데, 그것 또한 폐지 줍는 노인의 용돈 값을 불려주기만 했다. 사회적인 불황이 이어지면서 거래처들은 수시로 문을 닫았고, 그때마다 외상값을 떼었다. 서점을 폐업 신고하던 날 사장은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고 말했다.

서점을 그만둔 뒤로 나는 작곡에 몰두했다. 잘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트를 펼쳐 선율을 따라 그렸다. 그러다가 차츰 나만의 선율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작곡기법도 진화를 거듭했다. 손으로 일일이 그리던 아날로그 방식 대신 작곡프로그램에 악기를 연결시켜 손가락으로 터치만 해도 모니터에 선율이 그려졌다.

나는 작곡 프로그램에 키보드를 연결시켰다. 키보드는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오랫동안 다락에 처박아 둔 탓에 습기 먹은 건반은 피아노음색만 겨우 유지했다. 스트링 파트는 완전히 망가져 복구가 불가능했고, 브라스 쪽도 두어 개의 음색이 살아있긴 하지만 온전한 데시벨을 유지하진 못했다.

노래를 쉬는 동안 신은 내게 관용을 베풀었다. 청아했던 음색은 매미처럼 우화를 거듭해 마침내 허스키한 보이스로 재탄생되었다. 버스킹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앰프에 악스(Aux)케이블을 기타와 연결해 튜닝 겸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몇 소절을 흥얼거렸다. 스피커 앞쪽으로 새우깡에 혹한 비둘기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관객이 없을 땐 비둘기조차 위로가 되었다. 그때 스틱을 짚고 가던 노인이 뒤를 돌아다봤다. 노인을 의식해서일까. 갑자기 어깨에 힘이 쏠리면서 혀가 뻣뻣해졌다. 핑거링이 거칠어지면서 음색도 갈라졌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노랫말 때문인지 마음은 종잡을 수 없이 울컥해졌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원하는 방식으로 삶이 흘러갈 줄 알았는데, 이렇듯 텅 빈 객석을 두고 비둘기에게 목청을 돋울 줄이야……. 비둘기들은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날아가 버렸다. 미물이든 사람이든 얻어먹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면 인정사정없이 돌아서긴 매한가지였다.

뒤통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다섯 쌍의 검은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들은 심사위원처럼 근엄한 태도로 굽어보며 생트집이라도 잡을 태세였다. 나는 처음 오디션에 참가한 연습생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다음 곡 역시 발라드였다. 나는 키가 큰 요량치고는 손이 작아 하이코드를 잡는 게 꽤 부담스러웠다. 다음 곡은 E플랫조라 카포 사용만이 최선의 대안이었다. 프렛에 카포를 채우는데 수전증 환자처럼 손이 떨려 저들에게 들킬까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결국 카포를 빼버리고 다시 피크를 움켜쥐었다. 객석의 술렁거림이 느껴졌다.

이윽고 16비트의 강렬한 스트로크로 전주가 시작되었다. 슬로우 고고나 발라드만 고집해왔던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던진 또 다른 도전이었다. 순전히 나의 착각이겠지만 발라드에 모던락과 펑크락이 믹스된 선율과 비트는 허스키한 내 보이스와도 잘 어우러졌다. 발라드에서 락으로 분위기를 바꾼 건 순전히 불파를 의식해서였다.

무모한 용기는 어느덧 예술로 승화되었다. 늘어진 고무줄마냥 헐렁한 태도로 관망하던 불파의 멤버들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퍼스트는 벌어진 입으로 파리가 들락거려도 모를 지경이었고, 드러머는 대단한 영감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허공에다 스틱을 연신 돌려댔다.

긴장한 요량치곤 실수는 없었다. 나는 신곡 콘서트를 방금 끝낸 싱어마냥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한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퍼스트가 일어나 박수를 친 건 그때였다. 그 뒤를 따라 베이스와 건반, 드러머도 엉덩이를 엉거주춤하게 들어올렸다. 시종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빨강머리조차 박수를 쳤다. 멤버들은 철퇴라도 맞은 표정이었다. 그때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이 심장을 뚫고 용솟음쳤다.

빨강머리가 불쑥 다가와 내게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데 제목이 뭐죠?

'기억을 걷는 동안에도'

누구 곡이에요?

가수 나대로 씨요.

가수요?

빨강머리가 의구심 섞인 투로 반문하자 나는 좀 당황했다. 그의 옷에 박힌 스팽글이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속으론 꺼림칙하면서도 나는 일부러 힘주어 네,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빨강머리가 휴대폰에서 인터넷을 검색하다 말곤 고개를 갸웃했다.

가수 맞아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를 가수라고 인정한 사람이 세상천지에 엄마 말고 또 있을까. 그러는 엄마조차 가수라고 하면 될 것이지 꼭 무명가수라고 강조했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해도 제 이름으로 된 리코딩 음반도 한 장 없는데 가수는 개뿔! 이렇듯 빈정거리며 끝까지 무명가수라고 한다. 하긴 나도 아버지의 육성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자꾸 강요를 하지도 못하겠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묘비명에는 '가수 나대로 이곳에 잠들다'라고 새겨져 있긴 하니까. 알고 보면 엄마가 아버지의 유언을 들어준 것이겠지만.

어이 빨머, 거기서 뭐해! 악기 세팅 끝난 게 언젠데.

퍼스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친다. 순간 빨강머리의 면상이 일그러진다. 그는 트램폴린에서 튀어 오르듯 가뿐히 몸을 날려 무대에 오른다. 무대라고 해봤자 경계도 없는, 말하자면 음향 장비가 놓인 곳을 기점으로 안은 무대이고 밖은 객석이다.



며칠 후, 나는 정오의 해살을 받으며 역 광장으로 걸어갔다. 서두를 명분이 없는데도 걸음은 빨라졌다. 나도 모르게 쫓기듯 사는 일상에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직사광선이 정수리를 쿡쿡 찌르자 머리 밑이 근질근질했다. 땀이 질척이면서 지루성 두피염이 도진 것이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 약은 듣지도 않았다. 나는 두피에 들러붙은 딱지를 손톱으로 긁었다. 딱지가 벗겨지면서 핏물과 진물이 흘렀고, 손톱 밑으로도 고여 들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가로수에 내걸린 태극기들이 펄럭였다. 생각해보니 오늘이 바로 광복절이었다. 발길을 돌릴지 말지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돌아가기도 애매한 위치였다. 눈앞에 역 광장이 보이고 있었다. 나는 공휴일에는 버스킹을 쉬었다. 그건 암묵적인 룰처럼 정해놓은 나만의 원칙이었다.

역 광장에는 시위대와 경찰들이 대치 중이었다. 시위대는 어림잡아 백 명은 넘어 보였다. 그들은 '바른 나라 세우기'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고, 맞은편 진영의 경찰 쪽도 경계는 삼엄했다.

데시벨을 최고조로 올린 노래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익숙한 멜로디였다. 노래 제목이 생각날 듯 말 듯 하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순간 기억이 나를 전율케 했다. 엄마에게 들은 말이 생각나서였다.

아버지 곡들은 와 고리짝처럼 썩혔노? 히트 칠 곡도 더러 있던데.

지지리 복도 없어야. 돈이 안 될라카이 막걸리 몇 병과 맞바꾼 게 데모가로 풀렸제.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곳에서 아버지의 노래를 들을 줄이야.

내 기억 속 아버지는 결코 다정한 분은 아니었다. 한 집에 살아도 유령 같아서 명절에나 겨우 얼굴을 마주할 정도였다. 어쩌다 마주치면 공손히 예의를 지켜야만 하는 손님처럼 낯설었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든지 내가 먼저 다가가 응석을 부리는 건 기대조차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외출하면 나는 골방에 숨어 들어가 기타를 만지거나 오선노트를 들추며 놀았다. 골방은 두 면에 걸쳐 서가가 둘러서 있었는데, 방 가운데 세워진 거치대에는 손때 묻은 어쿠스틱 기타가 덩그러니 올려 있었다. 쪽창 아래는 직사각형 모양의 책상이 있고, 그 위에는 키보드가 자리를 잡았다. 오선노트는 키보드에 딸린 보면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골방은 아버지에게 단순한 음악작업실만은 아니었다. 서재도 되고 침실도 되었지만 궁극적으론 자신을 꽁꽁 숨길 만한 공간, 이를테면 벙커 같은 공간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골골한 모습으로 쪼그려 앉아 담배를 뻐끔거리던 아버지의 모습은 뇌리에 생생했다. 방문을 열면 왈칵 들이닥치던 구릿한 니코틴 향이 아버지의 체취처럼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서 나는 덤덤했다. 고작 아홉 살 철부지에게 사후의 격식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할까마는 억지로 울고 싶진 않았다. 그건 위선이었고, 그런 위선은 엄마만이 감당할 영역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친척들은 쪼그만 년이 매정하기 이를 데 없다며 면박을 줬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엄마도 그다지 농밀한 슬픔에 잠겨있진 않은 듯했다.



시위는 별 동요 없이 진행되었다. 유혈사태나 과격한 행위가 돌발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력한 방관자처럼 시위대를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버스킹을 포기하고는 펼쳐놓은 장비들을 거둬들였다. 앰프에서 악스 케이블을 분리하는데 퍽, 하며 굉음이 나를 놀래 켰다. 마치 탯줄이 끊어진 모양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실수였다. 앰프의 전원을 끄고 케이블을 분리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불파는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느슨한 주말이 지나가도록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덕분에 며칠은 지긋지긋한 자리싸움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닷새 후, 퍼스트가 흑단 같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광장으로 들어오고, 그 뒤로 빨강머리, 베이스, 건반, 드럼 순으로 줄지어 나타났다. 퍼스트와 빨강머리는 행사라도 몇 탕 뛰고 온 듯 잔뜩 멋을 부린 차림새였다. 나는 달려가 아는 체를 하고 싶었지만 엉덩이를 반쯤 덮은 헐렁한 박스 티에, 오래 입어 이색이 난 청바지차림의 내 몰골이 순간 부끄럽게 느껴져 그럴 수가 없었다.

퍼스트가 몸을 쭈뼛거리며 내게 제의했다.

오늘 저녁에 불고기 어때요?

전 채식 좋아해요.

그의 말에 맥박이 빨라지고 있는데도 나는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 미안해요. 불고기 말고 딴 거 먹을까요?

아네요.

혹 저번에 그 곡…… 악보 있나요?

아뇨. 제 머릿속에 있긴 하지만 아버지의 미발표작이라 함부로 내돌리진 못해요.

나는 방어하듯 표정을 굳혔다.

그쪽 아버님을 만나야겠군요.

그건 좀……오래 전에 돌아가셨어요.

퍼스트의 낙담한 표정을 보자 나는 마음이 졸아들었다.

우리 밴드 어때요?

퍼스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내게 환심을 사지 못했다는 걸 눈치라도 챈 듯 애매한 뉘앙스로 반문했다.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어요. 실력을 묻는 건가요?

제가 마음이 앞서서. 예전엔 여성보컬도 있었어요. 그쪽만 좋다면 함께 작업하고 싶어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인터넷에 떠돌던 이야기였다.

그 여성보컬을 설득시키는 게 더 효과적일 듯해요.

그럴 사정이 아니라서…….

멀리 사나요?

세상에 없어요……. 그게 마지막 콘서트였고, 그 후에 밴드가 해체되었어요. 나도 고향에 내려왔고요. 올 여름에 멤버들이 뭉치자고 찾아왔는데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버스킹이라도 해보고 결정하자고 했는데 갑자기 음악예능 프로에서 섭외가 왔어요. 솔직히 말해 PD와 대학 동기긴 해요.

그럼 앞으로 버스킹은 못 하겠네요.

아마도요. 이왕이면 신곡을 선보이고 싶은데…….

그제야 모든 정황이 이해되었다. 그러나 불파와 엮이는 건 신중히 결정할 문제였다. 그렇다고 설레발을 칠 만큼 경솔하진 않으므로 대답을 미루었다.

퍼스트가 똥줄이 타는지 자주 눈을 깜빡였다. 빨강머리도 뾰족한 턱을 치켜올렸다 내렸다 하며 마른 침을 삼켜댔다. 다른 멤버들은 도살장을 목전에 둔 꼬락서니로 풀이 죽어 있었다. 더 이상의 부연은 필요치 않았다. 짜릿한 전율이 내 목덜미를 쓸었다.

'이쯤 되면 칼자루는 내가 쥔 것이다. 뭐 그리 답답하면 무릎 꿇고 애원이라도 해보던가.'

그동안의 섭섭함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심산인지 나도 모르게 교만이 꾸역꾸역 올라왔다. 생각해보면 나쁘진 않았다. 저들의 성향이 트레쉬 메탈 쪽이라 템포 빠른 거친 감성의 곡들을 선호한다지만 헤드뱅잉만 강요하지 않는다면 신선한 조합이 될 것도 같았다. 솔직히 말해 이참에 아버지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비록 데모가로 풀려버리긴 했지만 역 광장에서 아버지의 노래를 들었을 때부터 작정한 것이었다.

집으로 곧장 가지 않았다. 불파와의 약속까진 두어 시간 남아있었고, 생각도 정리할 겸 거리를 쏘다닐 참이었다. 나는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키보드 건반을 머리에 떠올렸고, 발에서 튕겨 나온 음표들이 허공에 걸린 오선노트로 옮겨 붙었다. 약속 장소에 다다랐을 땐 선율의 조합은 끝이나 내 입에서는 후렴구가 흘러나왔다.



노랠 부르는 이 순간에도, 기타를 치는 이 순간에도 난 너를 느껴, 기억을 걷는 동안에도, 기억을 걷는 동안에도, 기억을 걷는 동안에도…….



식당 입구에 서 있던 퍼스트와 빨강머리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주어 허리를 곧추세웠다. 노을 진 하늘은 조명탄을 쏘아올린 듯 붉게 빛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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