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48)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48)
  • 입력 : 2020. 01.23(목) 20:00
  • 편집부 기자 hl@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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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17-1. 출구전략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뚝 그치자 시끄럽던 제주 시내도 조용하고 한산해졌다. 그러나 금한령으로 인해 국내 관광업계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더 큰 손해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정작 중국인을 상대로 사업을 하던 화교들이었다.




박근혜 정부 막바지에 승인한 미국의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배치를 중국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부터 자국의 국민과 군대를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사드를 배치하면 중국의 대륙간 탄도탄 미사일(ICBM)을 감시레이더의 영향권에 놓을 수 있어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대비였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지린성(吉林省), 산둥성(山東省), 랴오닝성(遼東省)에 중국 전략지원군 예하 3개 유도탄 여단의 둥펑(東風·DF) 계열 미사일 600여 기를 배치해 한국군과 주한미군 기지 등을 조준하고 있다.

그러나 사드가 배치되면 유사시 한국과 일본 타격용으로 쓸 미사일들이 무용지물이 된다. 이런 속내를 감추고 중국은 자국의 전략 안보 이익이 훼손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반대했다. 국내 진보론자들의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경상북도 성주에 사드가 배치되자 중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자국 단체관광객(유커,遊客)에 대해 금한령(禁韓令)을 내렸다. 한국관광객을 모집하지 않도록 여행업체를 통제했다.

이뿐만 아니라 한류 열풍을 잠재우기 위한 부당한 간섭을 시작했고, 사드 배치 장소를 제공한 롯데그룹에 대한 불매운동과 95%에 달하는 한국의 화학제품, IT제품의 원자재 수입금지 등 경제적인 보복을 감행했다.



사드 여파로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뚝 그치자 시끄럽던 제주 시내도 조용하고 한산해졌다. 가는 곳마다 유커들로 인해 소란스럽고 혼잡해서 제주를 기피 했던 국내 관광객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한령으로 인해 국내 관광업계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더 큰 손해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정작 중국인을 상대로 사업을 하던 화교들이었다.



"왕금산 당장 오라고 해. 감사 내려간다고 통보까지 했는데 회장도, 사장도 없고 이 무슨 경우 없는 짓이야?"

불룩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대표 사무실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은 감사반장은 단호한 어조로 왕은산의 혼줄을 빼놓았다. 랴오닝 그룹에서는 대룡여행사의 자금 해외유출 의혹의 진상 파악을 위해 3명으로 감사반을 구성하고 제주에 내려 보냈다.

감사반은 삼미동 차이나타운의 계획 차질, 하나도 프로젝트의 취소 과정도 철저히 조사하라는 본사 해외전략본부의 특명을 받았다.

"사정이 있어서 왕 회장님은 한국에 올 수 없는 형편입니다."

"사정이란 게 뭐요?"

"일을 열심히 하다가 실수를 저질러서 수배가 내려진 상황입니다. 대신 제가 대표 대행을 맡고 있으니까 성실히 수감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물어봅시다. 도대체 해외자금 도피 건은 어찌 된 거요?"

"그건 오해십니다. 문제는 차이나타운의 공사 중단과 사드 여파로 유커들이 오지 못하게 된 게 근본 원인입니다. 거기서 건설업자들에게 줘야 할 공사비와 임금이 몇 달째 밀리는 형편에서 일단 구조조정을 통해 직원들을 해고했어요. 그 과정에서 누군가 왕 회장이 자금을 해외로 도피시켰다고 해코지한 것입니다."

그러자 깡마르고 머리가 벗겨진 감사반원이 다시 물었다.

"그럼 자금을 해외로 도피시킨 게 아니란 말씀이오?"

"도피가 아니라 투자입니다. 사드 문제가 일어나기 전부터 왕 회장님은 사업 확장을 위해 일본과 동남아시아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우선 도쿄에 지사를 만들었어요. 거기에 운영자금을 보낸 걸 오해한 겁니다."

"아니 우리의 승인도 없이 500만 달러를 송금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 돈이 없어진 건 아니잖습니까?"

감사반원들은 집요하게 따졌다.

"그럼 사후에라도 보고했어야지. 왜 안했소? 우리 모르게 빼돌리려다 들키니까 궁색한 변명하는 거 아니오?"

"그건 절대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은산이 해명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반장이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변명해도 소용없소. 위에선 배신이라며 제주에서 사업 철수 수순을 밟고 있어."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은산은 새파래진 얼굴로 물었다.

"사업 철수라면 어느 선까지?"

그들은 이미 위에서 결정한 사항을 통보했다

"카지노는 우리가 직접 운영할 거고 나머지, 호텔, 식당, 전세 버스는 매도 처분하기로 결정됐소."

은산은 현기증을 느끼더니 다리 힘이 풀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면 우린..."

"조직에서 사람은 부속품 아니오? 수명이 다하거나 쓸모없어지면 폐기처분은 당연한 귀결이지,"

그러자 감사반장이 말을 이었다.

"어디서 족보도 없이 굴러먹다가 감히 박치기하려고. 한족이라고 다 같은 한족인 줄 알어?"



금한령으로 인한 피해는 대룡만이 아니었다. 유커들을 위해 매입했던 호텔과 대규모 식당들, 면세점, 전세 버스 업체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중국 관광객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들이 부도를 내기 시작했고, 불법으로 장기체류하며 관광업에 종사했던 가이드들과 호텔, 식당 종업원들이 자진 신고하며 출국했다.

코리아 드림을 안고 제주에 왔던 중국인들과 조선족 동포들은 금한령이 오랜 기간 풀리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비싼 가격으로 마련한 부동산을 처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랴오닝 그룹이 입은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랴오닝 그룹의 철수로 인해 대룡 관광과 대룡반점의 폐업으로 인한 직원들의 밀린 월급과 대출금을 갚기 위해 유람선을 포함한 버스, 호텔, 식당 등 부동산들을 매입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왔어. 지금 막 공항에 도착했대."

그 말은 곧 밖으로까지 전해졌다. 맏상주 없이 어떻게 장례를 치를까 걱정하던 친족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형사들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


삽화=고재만 화백



그러한 일련의 사태에 충격을 받아 투병하던 왕강룡 씨가 60 중반의 아까운 나이에 숙환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병원 장례식장에는 미망인, 리화와 은산의 가족들, 부산 사는 망인의 여동생 부부 자녀까지 내려와 분주하게 문상객들을 맞이했다. 조문객들은 화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왕강룡 씨와 생전 인간관계를 맺은 제주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왕강룡 씨의 죽음은 단순한 화교 2세 종언 이상의 파문을 남겼다. 그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불굴의 커쿠나이라오(克苦耐勞) 정신으로 성공한 코리아 드림의 산증인이기 때문이었다.

장례가 5일 장으로 결정된 것은 주상(主喪)인 금산을 위한 배려였다. 그 사이 일본에서 리화도 오고 사업과 연관된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정작 큰아들인 금산은 출상일을 하루 앞두고도 연락이 없었다.

밖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하던 은산이 분향실로 들어와 상주석에 앉아 있는 리화에게 물었다.

"아직도 연락 없어?"

리화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끄덕이며 말했다.

"오빠 알만한 곳에 부고는 다 전했으니 어디서건 소식은 들었을 거야."

"이러다 맏상주 없이 장례 치르는 거 아냐?"

"오빠 저기 봐. 저 사람들 형사 맞지?"

리화가 식당 한쪽 구석에 앉아 날카로운 시선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는 가죽점퍼 입은 사내 둘을 가리켰다. 은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 투병 사실을 알면서 코빼기도 안 비친 형이 '나 잡아 가슈'하고 나타날까?"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더 기다려 보자구. 설마 아버지 마지막 가는 길에 기별이..."

밖으로 시선을 두며 말을 하던 리화의 동공이 커지며 갑자기 안색이 밝아졌다.

"어머 저기 용찬 오빠 아냐?" 말쑥한 검은색 정장 차림의 권용찬이 분향실에 들어서자 꺼져있던 풍선 인형에 바람이 들어간 듯 리화가 벌떡 일어서서 다가서며 맞이했다. 영정을 한번 슬쩍 바라본 용찬은 향을 꼽고 절을 했다. 은산에게 악수를 청하며 리화에게 다가서는데 리화가 와락 안기며 울먹였다.

"와 줘서 고마워요."

"금산은?"

리화는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용찬은 리화를 살며시 안으며 위로했다.

"그놈 성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타날 거야. 한참 나이신데 참 안되셨어."

은산이 자리를 피하며 밖으로 나가는데 상주석 방석 사이에서 경쾌한 음악소리가 들렸다. 리화의 휴대 전화였다. 리화는 용찬의 포옹에서 벗어나 황급히 전화기를 주어들고 전화를 받았다. 금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화냐?"

"오빠야? 오빠 어디야 지금? 어디라고? 알았어. 빨리 와."

리화가 휴대폰 뚜겅을 닫으며 밝은 표정으로 은산에게 말했다.

"오빠 왔어. 지금 막 공항에 도착했대."

그 말은 곧 밖으로까지 전해졌다. 맏상주 없이 어떻게 장례를 치를까 걱정하던 친족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형사들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

"하이고 이제야 망인이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구만."

그의 출현이 얼마나 기뻤던지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왕금산의 출현 예고는 침울했던 장내 분위기에 활기를 불러 놓는 계기가 됐다. 잔잔하던 용찬의 마음에도 잠시 파문이 일었다. 리화는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용찬은 일부러 딴전을 부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해 분향실 밖으로 나갔다.

용찬의 눈치를 살피던 리화는 체념한 듯 어두운 표정으로 상주석으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또 다른 불안한 기운이 그녀를 감쌌다. 용찬과 금산이 마주칠 때의 상황이 걱정되어서였다. 용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복도에 나와 서성이던 용찬은 어차피 부딪혀야 한다고 작심하고 식당으로 들어가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장내가 다시 평정을 되찾고 조문객들이 몰려들 때쯤 출입구가 시끄러워지더니 왕금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의 형사가 뒤따르고 있었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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