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10)제주의 전염병(상)

[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10)제주의 전염병(상)
“홀어미 의지할 곳 없고 어린아이 누가 보육할 것인가”
  • 입력 : 2020. 05.18(월)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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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질은 요사한 귀신이 벌이는 장난”
국가의 시험대 민중 위기 관리 능력
전염병 창궐 때 새로운 정책 나와


전염병은 인간을 줄곧 괴롭혀왔다. 아는 바와 같이 전염병의 주인공은 바이러스인데 전쟁의 살상을 능가할 정도로 바이러스의 공격은 인류 역사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어서 반드시 살아있는 세포의 생명체를 숙주로 삼아야만 번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생명체에 기생하면서 생명체를 위협하는 바이러스의 역설은 생명체가 존재하는 한 인류와 함께 가야 할 침묵의 동행자인 것이다.

지구상의 생명체를 일러 유기체(organism)라고 하며, 그 살아있는 생명체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어야 한다. 먼저, '유전(遺傳;Genetic)과 번식(繁殖;Reproduction)'으로, 유전은 자신이 갖고 있는 특징을 후손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이며, 번식은 자기 자손들을 계속 재생하면서 퍼뜨리는 능력을 말한다. 다음은 대사(代謝;Metabolism)인데 한 생물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질의 생성과 변화작용이고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생물의 생존력이다. 세 번째 특징은 환경에 대한 '반응(反應;Response)'으로, 생물이 주어진 환경을 알아채고 적응하는 능력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생물의 성질은 겉모습뿐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가 바뀌어 가는 '진화(進化;Evolution)'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덧없는 죽음의 횡포를 풍자한 판화. 뽀사다 작, 미치광이 돈키호테, 멕시코, 1890년대.

2019년 12월 중국 우한발 코로나바이러스가 전세계를 엄습했다. 이 바이러스는 빠르게 전파되어 2020년 5월 16일 오전 7시 기준, 전 세계 감염 확진자가 462만8785명(한국:1만1037명. 제주:14명)에, 사망자가 30만8651명(한국:262명, 제주:0명)이 되었고, 이 수치는 언제 멈출지 모른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멈출 줄 모르고 진행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팬데믹(pendemic;세계적 대유행)에서 '엔데믹'(endemic;주기적으로 발병되는 풍토병)이 될 수도 있다는 예상을 내놓았다. 대개의 전염병은 백신이 개발되면 다스려진다. 그러나 1982년에 처음 보고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cncy virus. HIV), 일명 에이즈는 현재 사라지지 않고 진행되고 있고, 코로나19 또한 아직 그 전망의 끝을 볼 수가 없다. 또 결핵이나 콜레라, 독감 바이러스는 풍토병이 돼 잊을 만하면 다시 나타나 유행하며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역병에 무능했던 조선시대

우리의 전통시대는 중국을 사대하고 유교를 신봉함으로써 농업을 우선시하고 상(商)·공(工)을 경시하여, 자연과학 분야를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오래도록 중화(中華)의 틀에 갇혀 문사(文士) 중심의 정책으로 기울다 보니 상대적으로 기술과학·의술 분야가 낙후되었다. 전염병에 대한 인식도 낮아 발병하게 되면 그것을 원귀(원鬼)의 작난(作亂)으로 생각해 제사를 지내거나 그 귀신을 피하라고만 했다. 그래서 전염병을 역병(疫病)이나 역질(疫疾), 또는 이름 모르는 괴질(怪疾)이라 불렀는데 두창(痘瘡;天然痘, 마마), 호열자(虎疫, 虎烈子;콜레라)의 이름을 지었어도 그 원인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삼국시대에는 전염병을 모두 역질(疫疾)로 불렀다. 역질이 발생하면 마을을 비우고 국경을 넘어 도망가는 자들이 많았다.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전국에 역질이 번지기는 마찬가지인데 그 병이 어떤 병이었는지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아서 여귀(려鬼)나 요귀(妖鬼)의 소행쯤으로 여겼다.

코로나19 시국에 마스크를 쓴 돌하르방 앞을 지나는 관광객. 한라일보DB

중국에서 전염병이 발생한 기록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이다. 16세기 명나라 저서에, "천연두(天然痘)란 역질은 주(周) 나라 말엽, 진(秦) 나라 초기에 비롯되었다" 고 전하면서도 이 천연두란 역질은 소금을 먹기 때문이고, 생긴 지는 오래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다.

조선 후기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도, "요즈음 와서는 또 '홍진(紅疹)'이란 역질이 있는데 이는 널리 퍼진 지가 아직 백 년이 차지 않았다. 풍토와 기후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뭐 괴상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무릇 역질 따위에는 모두 귀신이 있어서 여역(려疫:돌림병)·두역(痘疫:천연두)·진역(疹疫:홍역)의 모든 귀신들이 뭐를 아는 듯이 서로 전염시키고 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나는 자에게는 반드시 전염시키지 못하지만, 아주 가깝게 통해 다니는 친척(親戚)과 인당(姻黨, 外家)에는 번갈아 가면서 전염되도록 한다. 대개 이 귀신의 행동도 사람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은 귀신에게 이리저리 빌기를 잘한다. 이는 무식한 짓이니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자신을 삼가서 귀신을 피하는 것만이 필요할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

'동의보감'은, "전염(傳染)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온역(瘟疫:돌림병)을 앓는 집에서는 자연히 악기(惡氣)가 생기므로 그 악기를 맡으면 즉시 전염된다. 그러니 향유(香油)로 코끝을 문지르거나, 또는 종이를 꼬아서 코를 더듬어 재채기를 내면 좋다."라는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조선시대 제주의 역병

전염병은 국경이 없으며 보이지 않는 침묵의 살인자이다. 중종 21년(1527) 3월에서 5월 15일까지 제주에 전염병이 크게 발생하여 제주목에서 86명, 대정현(大靜縣)에서 22명, 정의현(旌義縣)에서 32명이 사망했는데 계속 전염병의 병세(病勢)가 수그러들지 않자 정부에 구료용(救療用)으로 청심환(淸心丸) 등의 약을 요청하기도 했다.

선조 23년 경인년(庚寅年, 1590년)에 전염병이 있는 뒤로, 제주도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 도민이 태반이나 사망하여 빈집이 3분의 2나 돼 섬을 방어할 장정이 없게 되었다. 1600년 관청은 궁여지책으로 섬 방어를 위해 교생(校生)의 인원수를 줄였다. 향교에 이름만 올려놓고(校籍) 편안히 놀고 지내는 유생들에게 시험을 치고는 불합격한 제주목 유생 106명과 정의현(旌義縣) 유생 2명을 법에 따라 강등시켜 군역(軍役)에 충당했다. 사실상 장정(壯丁)이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새로 여정(女丁)이 등장하는데 정의현에서는 여성으로 하여금 읍성을 지키게 하였다(1604). 전염병(1590)에 이어서 임진왜란(1592)이 발발하고, 또 연이은 전염병(1603)으로 인한 흉작과 기아는 제주를 구휼의 섬이 되게 했다. 이 대목에서 여정이라는 제주 여성의 신화적 허상이 드러나는데 여정은 영웅적인 제주 여성의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사실상 남정네 부족과 알량한 양반 유생들의 병역 기피의 민낯이었을 뿐이다. 인조 때 내려진 출륙금지령 또한 200년 동안 이어진 것도 제주도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한 극단적인 조치였는데 생산과 국가 방어, 조세를 책임질 사람들이 줄어드는 국가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숙종 40년(1714년) 3월, 제주에 역질이 크게 유행하여 1000여 명이 죽었고, 영조 33년(1757) 8월에는 제주의 세 고을에 역질이 돌아 사망한 자가 무려 500여 명에 이르렀다. 11년이 지난 정조 12년(1788) 9월에 다시 제주도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람이 많이 죽자, 정조는 구휼과 세금의 면제 조치를 내렸다. "금년에 병 때문에 사망한 무리들은 각별히 위로하고 구휼해 주라. 가난해서 장례를 치르지 못한 자들은 관가에서 물자(物資)를 도와 주고, 또 병으로 인해 농사를 짓지 못했거나 고기잡이를 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특별히 사정을 참작해서 세액(稅額)을 감해 주라. 그리고 매월 바치는 물선(物膳;진상품목) 중에 추복(追鰒)·인복(引鰒)·오적어(烏賊魚) 등의 종류는 절대 멋대로 징수치 말며 피해에 따라 세액을 감해 주고 수효도 즉시 줄여서 봉진(封進, 진상)케 하여 차별없이 백성을 한결같이 조정의 은택을 입게 하라." 이렇듯 정조의 위기 대응 능력은 뛰어났다.

순조 22년(1822) 여름, 다시 제주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수천 명(耽羅紀年에 3000명)이 죽으니 순조는 위유어사(慰諭御史)를 보내 제주도민들을 위로케 했다. "마을은 비었고 조촐해졌는데 홀아비·홀어미는 의탁할 곳이 없으니, 누구에게 의지하여 살 것이며, 어린 아이는 먹여줄 사람을 잃었으니, 누가 이를 보육할 것이냐, 죽은 이도 참으로 측은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도 또한 더욱 비참하다." 제주에 온 위유어사는 유생과 무사들을 위해 과거 시험을 보았고, 한양으로 돌아가서는 우도의 목장을 백성들이 개간하도록 요청했으며, 남녀 제주인들을 육지에 오가며 혼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바랐다. 전염병 바이러스의 엄습은 끝이 없었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새로운 대안과 정책이 꼬리를 물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이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었다.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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