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윤의 목요담론] 통찰, 자기와 세상을 보는 눈

[김태윤의 목요담론] 통찰, 자기와 세상을 보는 눈
  • 입력 : 2020. 05.28(목) 00:00
  • 강민성 기자 kms6510@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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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의 눈은 영롱하고 신비롭다. 해맑게 웃는 눈빛이 절대순수 그 자체이다. 한편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성자의 눈빛이다. 그 눈을 보고 있으면 절대자의 온유와 사랑을 저절로 알게 된다.

아기는 자기의 바람을 표현하고 요구해야 그것이 이뤄지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때마다 부모의 가치와 기준이 아기에게 전이돼 들어간다. 아기는 그러한 정보의 흐름을 알지 못한다. 아기는 자라면서 요구할 것도 필요로 하는 것도 많아져 간다. 그 만큼 여러 가지 기준을 받아들이며 익숙해져 간다. 절대순수의 눈빛이 세상의 빛으로 변해간다. 사회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대가이다.

아이의 몸과 마음이 빠르게 성장한다. 사회성을 익히는 것도 중요한 성장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순수하고 온유한 마음이 견고해져 간다. 사람들은 그것을 세상에 잘 적응하는 것이라며 격려한다. 부모와 사회는 자기가 좋아하거나 지향하는 가치를 아이에게 가르친다. 아이는 그 가르침을 가슴에 쌓으며 살아간다. 가슴에 쌓이는 것을 마음에 녹이며 자라는 것이 자아이다. 자아는 절대순수와 교환하며 얻는 것이다.

학교와 사회가 가르치는 표준과 기준을 배우게 된다. 취업하면 회사가 바라는 규범을 익히고 실천하기 바쁘다. 학교와 회사가 요구하는 것만 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의 요구대로 화답하며, 칭찬 한마디에 만족해한다.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와 기준으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만 존재한다. 고유한 자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다움을 잃으며 자아를 키우고 있다. 자식을 낳으면 아이에게 대물림한다. 자아를 경험이라 속이며 아이에게 선물한다. 오히려 세상은 좋아지지 않고 나빠지고 있다.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사람들은 정체성에 관심이 없다. 사람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 부연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없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술과 기능을 가진 자로만 존재하게 된다. 더 이상 자기 존재가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같은 진영에 있는 것을 확인하며 안도해한다. 누구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학습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자기로 사는 삶에 대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를 잃어가고 있다.

자기를 찾아야 한다. 자기를 찾으려는 고독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고독은 자기를 찾게 하며 행복을 이끌어내는 힘을 키운다. 사람은 자기가 감당하는 고독의 시간이 길수록 위대하게 된다.

자기를 통찰해야 자기를 찾을 수 있다. 통찰의 시작은 마음의 감정과 본래의 자기를 구분하는 것이다. 마음에 일렁이는 감정을 모두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고 소멸되는지, 그 전체를 깊이 살피는 것이 통찰이다. 자기를 통찰하면 결코 자기애에 빠지지 않는다. 자기를 통찰해야 자기를 볼 수 있고, 본래의 자기로 살 수 있다. 또한 자기를 통찰해야 세상을 있는 그대로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자기만의 고유한 안목과 직관으로, 자기와 세상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김태윤 제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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