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에 아버지 잃은 소년, 남은 가족 살리려 전쟁터로

4·3에 아버지 잃은 소년, 남은 가족 살리려 전쟁터로
"이념 전쟁에 가족들 빨갱이로 몰릴까봐 참전 결정"
"무고한 양민들 남겨두고 올 때가 가장 가슴 아파"
  • 입력 : 2020. 06.04(목) 18:01
  • 이상민기자 has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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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회 현충일을 앞두고 본보와 인터뷰를 가진 문창해 할아버지가 70년전 18세의 어린나이에 6.25 참전을 결정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다 눈물을 쏟고 있다. 이상국 기자

"어머니 저 참전하쿠다" "무사 거기 가젠 햄시, 너는 무섭지도 않으냐" "우리 가족 살젠하믄 이거 밖에 어수다."

 18세 소년은 생각했다. 가족이 살려면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 밖에 없다고. 6·25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 소년의 아버지는 4·3 광풍에 휘말려 무고하게 희생됐다. 억울하게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건만, 소년의 가족에겐 연좌제의 굴레까지 씌워졌다. 그런데 또다시 이념 전쟁이라니. 아군과 적군이 모호한 민족 상잔 속에 연좌제 덫은 다시 가족들을 빨갱이로 몰게 뻔했다.

 "내가 군인이 되면 우리 가족들은 더 이상 빨갱이로 몰리지 않겠지요. 어떻게든 가족을 살려야 하니까. 그래서 참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순간 노인의 얼굴이 무너졌다. 닭똥 같은 눈물이 깊게 패인 주름을 타고 또르르 떨어졌다.

 문창해 할아버지(88·제주시 용강동)에게 6·25 참전은 피할수 없는 선택이었다. 18살 어린 나이에 군인이 된 그는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 운명을 맡겼다.

 문 할아버지는 6·25 사변이 발발한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야산에서 땔감을 구해 집에 오던 중 우연히 만난 제주중학교 선생으로부터 전쟁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전한 교사는 이미 피난길에 오른 터였다. 문 할아버지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족 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연좌제에 걸린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도 걱정됐다. 이튿날 그는 곧장 학교로 가 문육생 선생을 찾았다. "선생님, 언제 징집될지 모르니 우리만이라도 먼저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문 할아버지와 제주중학교 재학생 50여명은 제주시 삼양이동에 있던 빈 공회당(주민들 집회를 위해 세워진 공공건물)을 빌려 이 곳에서 합숙 훈련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집명령이 떨어졌다. 학교에서는 문 할아버지를 비롯한 재학생 120여명이 징집돼 그해 8월30일 해병대 3~4기로 정식 입대했다.

 9월1일 꽃다운 청춘 3000여명이 제주항에 모였다. 함정을 타고 경상남도 진해 해군기지로 간 이들은 각자 맡은 임무에 따라 통영으로, 그리고 부산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전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참혹했다. 바로 옆에서 전우가 죽어 나갔지만 쳐다볼 겨를이 없었다. 폭탄 파편이 등에 박혀 피가 낭자하게 흘러도 다친줄을 몰랐다. 문 할아버지는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고 했다.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후퇴할 땐 전투에서 진 것보다 무고한 양민을 두고 떠나야하는 게 더 가슴 아팠다. "우리가 지켜줘야 하는데, 그냥 두고 와야 한다니… 그게 계속 눈에 밟히는 거에요" 인터뷰 도중 퉁퉁 부은 문 할아버지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장진호 전투에서 동상에 걸려 손톱 3개가 빠졌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진 낭림산맥은 영하 30~35℃까지 기온이 내려갔다.

 부은 손가락처럼 전쟁의 상흔은 오랫동안 문 할아버지를 붙잡고 있다. 그는 매달 악몽을 꾼다. 얼마 전에도 북한군에 포위 당하는 꿈을 꿔 잠자리가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전쟁은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건만 참전 용사들이 점점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 수많은 희생이 없었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겠어요? 그 희생들을 잊으면 안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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