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표 박사와 함께하는 한라일보 인문역사 강의] (6)제주 유배인 적려유허비

[홍기표 박사와 함께하는 한라일보 인문역사 강의] (6)제주 유배인 적려유허비
문헌 자료가 못다 전한 이야기 비문에
  • 입력 : 2020. 09.22(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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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오현단에 있는 충암김선생적려유허비.

제주 유배인 350명 전후
관련된 장소 유허비 6기
제주 끼친 영향 등 담겨
충암·우암·서재·동계 등
4기 조선시대 세운 비석

제주 유배인은 350명 전후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를 기리기 위해 유배 장소에 비석을 세웠는데 현재 6기가 있다. 충암 김정 적려유허비, 우암 송시열 적려유허비, 동계 정온 적려유허비, 서재 임징하 적려유허비, 추사 김정희 적려유허비, 서재 한천 적려유허비다. 앞의 네 기는 조선시대에 세운 것이고 나머지 두 기는 최근의 것이다.

유허비는 기존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거나 제주와 관련된 새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유배인과 관련해 정사나 사서에 소개된 행적이나 업적말고 실제 언제 제주에 들어왔고, 어떻게 지냈는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와 관련된 글이 비석에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충암김선생적려유허비(충菴金先生謫廬遺墟碑)는 제주시 오현단 오현조두석 왼쪽(동쪽) 뒤편에 서 있다. 현재 상반신만 남아 있고 하반신은 없다. 적거지였던 가락천 동쪽에 파손된 채 있던 것을 해방 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비 후면의 비기로 보아 1852년(철종 3) 11월 당시 목사였던 백희수와 판관 임백연이 옛 적거지에 세워 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尤庵宋先生謫廬遺墟碑)는 오현단에 들어서서 향로당 바로 옆, 첫 번째로 세워 있고 가첨석과 비신, 귀부로 이루어져 있다. 총 높이가 220cm나 되는 매우 큰 비석이다. 1772년(영조 48) 2월 목사 양세현이 송시열의 적소가 있었던 제주시 일도1동(칠성로) 1289번지에 세웠다. 당시 제주에 유배 왔다가 풀려난 권진응의 권유로 세워졌는데, 후면에 김양행이 짓고 이극생 글씨로 쓴 비기가 있다. 1801년(순조 1)에는 목사 정관휘가 비각을 신설했다. 1935년 일제강점기에는 제주향교로 이건 되었다. 1945년 해방 후 제주향교에 제주중학교가 들어섰고, 1977년 제주중학교 운동장이 확대되면서 그해 4월 오현단으로 옮겨졌다.

서재임선생적려유허비(西齋任先生謫廬遺墟碑)는 1862년(철종 13) 4월 임징하의 5대손 임헌대(任憲大) 제주목사가 세웠다. 처음에는 귀양살이하던 감산리 속칭 '묵은터' 고제영(高濟英) 집이 있던 곳에 세웠으나, 그 후 고씨 후손이 감산리 274번지(속칭 장기터)로 이사하며 비석을 옮겼다가 지금은 안덕면 감산리 복지회관 마당 한 쪽에 있다. 후면에는 5대 종손인 경연관 임헌회(任憲晦)가 짓고 제주목사 임헌대가 쓴 비명이 새겨 있다. 그는 제주 유배 생활 중 예전에 제주목사를 지내며 무명세 폐지 등에 나선 임홍망(任弘望)의 손자라 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대우를 받았다. 임징하가 제주를 떠날 때 남겼다는 '제주 유생과 헤어지며(留訣諸生)'의 시가 '서재집'에 실려 전한다.

동계정선생유허비(桐溪鄭先生遺墟碑)는 1842년(헌종 8)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가 유배생활을 하던 추사 김정희와 협의하여 적소가 있었던 대정성 동문 안 막은골(대정읍 안성리)에 세웠다. 그 후 동문 성 밖에 있다가 1963년 대정읍 보성초등학교 교정 안에 옮겼으며, 1977년 4월 현 보성초 입구로 옮겨 세운 것이다. 후면에는 이원조 목사의 비기가 새겨져 있다.

표선면 가시리 청주한씨충의사 서재한공유허비(恕齋韓公遺墟碑)는 비문 말미 '숭정후오기묘년중추월성최익현 근식(崇禎後五己卯年仲秋月城崔益鉉 謹識)'으로 볼 때 1879년(고종 16) 가을에 세웠으며 면암(勉庵) 최익현이 글을 지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비석을 세우던 1879년은 그가 흑산도에서 제2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 고향에 방축 되던 해다. 이런 점으로 보아 그가 제주도의 유배 생활 때 비문을 미리 써놓은 것인지 또는 흑산도나 그가 있던 경기도 포천에 가서 써온 것인지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이 비는 그때 세운 비가 그대로 보존돼 있는 것은 아니다. 1976년 한씨문중회가 마멸도가 심한 비신은 땅에 묻고 새 비(서재한공휘천유허비恕齋韓公諱천遺墟碑)를 제작하여 비기는 그대로 새기고 기존 비의 관석을 사용하여 세웠다. 그 후 사당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중 매비가 발견되었는데, 서재한공유허비라 되어 있고 현재는 이 비까지 2기가 함께 세워 있다.

대정읍 제주추사관에 있는 추사김선생적려유허비(秋史金先生遺墟碑)는 건립 연월일, 건립 주체가 새겨져있지 않다. 확인 결과, 1970년대말 건비했고 비의 글씨는 연농 홍종시의 것으로 손자인 만농 홍정표 소장 서예를 제공했다. 뒷면 글씨는 청탄 김광추가 썼다. 비에는 추사 김정희의 약력, 제주 유배생활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담겼다.

*강의 영상은 한라일보 유튜브 채널(촬영·편집 박세인 기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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