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32)제주공예박물관개관전 채색화

[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32)제주공예박물관개관전 채색화
21세기 다시 탐라 채색화의 부활을 꿈꾼다
  • 입력 : 2020. 10.26(월) 00:00
  • 강민성 기자 kms6510@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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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까지 개관전 열려
수난 역사에서 전해온 미감

제주채색화 길 새롭게 제시

개관전에 소개된 제주도효제문자도 병풍.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색깔

신화를 문학중심주의로 보게 되면 스토리에 연연하게 되게 된다. 그러나 본풀이에는 조형 감각과 색채의 풍부한 미감이 살아 있다. 지금까지 문학중심주의 논자들은 신화의 서사구조에 매달렸고, 서예에 익숙한 나머지 수묵 중심의 사고(思考)를 탈피하지 못했다. 또 대학에서는 기운생동을 문기(文氣)로 여겼던 성리학적 문인화의 틀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으며, 채색화 또한 희뿌연 일본식 색깔의 아류에 매몰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나올까. 우리의 채색화 전통은 박대(薄待)받다 못해 천대(賤待)받아 사라진 듯 여겨졌으며, 그런 무자비한 색깔 이데올로기의 저변에는 외래 종교의 영향이 큰데 토착 신앙을 미신이라 주장하며 공격했던 서구 종교의 여파가 있어 우리 채색화를 무당 그림, 상여 색깔이라는 이상야릇하고 저속한 누명을 씌워버렸다. 그 후 그런 색채관념이 사회적 통념이 돼 오방색은 곧, 기분 나쁜 향냄새가 나는 색깔이 돼버렸다.

그러나 색깔 스스로는 무엇을 의미한 법이 없고 모두가 인간의 조작질에 의해서 색깔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생겼으며, 그 때문에 색깔은 매우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모든 색깔은 이념이 없고, 어떤 주장을 할 수도 없으며, 만물 자체가 자기 본래의 색을 드러내며 살아가니까 색깔에 어떤 이념이나 상징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세상을 거짓말로 현혹시키려는 불순한 정치적 행위가 된다.

색깔은 배색에 의한 조화의 문제여서 어떤 색이 어떻게 만날 때 채도와 명도에 따라 세련되기도 하고, 촌스럽게 되기도 하지만, 또 아름답게 되기도 해 배색에 따라 다양한 가치 평가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색깔은 만물의 생태와 운동적 특성에서 나오며, 오방색은 그것을 간단하게 임의대로 분류해서 사용한 것이다. 서양의 3원색에 해당하는 우리의 적·청·황은 서로 상통하는 기본색들이다. 오방색은 거기다 흑과 백의 두 가지 색을 더 포함한 것이다.

제주공예박물관 양의숙 대표.

#탐라 색깔의 문화사

색깔은 어느 종족이나 민족이 선호했던 스타일과 패턴이 있고, 같은 오방색의 의상이나 미술작품에서도 밝은 분위기인가, 아니면 어두운 느낌인가, 색깔이 강한가, 어떤 터치를 이용했는가에 따라 지역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탐라색이란 갑자기 하루아침에 주장된 색깔이 아닌 탐라의 전 역사과정에서 보여진 색깔이며, 그에 대한 전승으로 현재 전해오는 화가나 미술작품, 그리고 미적 표현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연관지어 생각돼야 한다. 탐라국 자체가 패망한 왕국이어서 색깔의 문화적 맥락을 찾기가 매우 어렵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도 다른 지역의 색깔들과 전승되는 스타일을 비교할 때 확연하게 다른 아우라(작품 특유의 풍기는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다. 탐라(제주)의 전통미술 작품과 다른 지역 미술작품과 한 자리에 놓고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금방 알 수가 있고, 제주 전통 미술작품을 모아서 보면 계통적인 패턴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과거 희미한 기록이나마 탐라(제주)와 관련된 미술관련 기록을 찾아보자.

고려 목종 5년(1002) 6월과 다시 목종 10년(1007)에 탐라 서산(瑞山)이 바다 속에서 용출했다. 이때 태학박사 전공지(田拱之)가 그 장면을 자세히 관찰해 그 사실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이것이 탐라 최초의 기록화이다.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이 목호의 난을 평정키 위해 추자도에서 바람을 기다릴 때 병사들에게 한 교시에, 탐라의 "절간(佛宇), 도교사원(道殿), 신사(神祠, 본향당)를 수호하는 것들은 건드리지 말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몽골은 도교와 불교를 숭상했고, 그 도교사원에는 신선그림이 있었을 것이다.

제주공예박물관 개관기념전.

또,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육지인 화승(畵僧)으로서 제주에 최초로 유배된 이는 학선 스님이다. 학선은 거문고 타기와 그림그리기를 잘했으며, (강화도)선원사(禪源寺) 동·서편 벽의 신중상(神衆像)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고, 충혜왕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서 1343년 여름 제주에 유배됐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후 제주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추정하건대 고려시대 절간은 그 터만 남아 기록으로만 전해 온다. '당오백 절오백'의 명성대로, 수정사, 법화사, 원당사, 보문사, 묘련사, 서천암 등이 있어 기본적으로 절간 벽화나 탱화의 수효를 가늠케 한다.

그리고 멀리 윈난성에서 유배 온 양왕 가족의 제주 정착, 15세기 세조 때 기록이 있는 현존 '전(傳)내왓당무신도 10신위', 숙종 때 제주 목사 이익태 때 그린 '탐라10경도', 1703년 이형상 때 김남길이 그린 '탐라순력도', 이번 제주공예박물관 개관전에 첫 선을 보인 '제주목도성지도' 12폭과 그리고 선비화가 고경욱의 '영주십경도' 제작 기록, 영조 때 '제주잠녀도'에 대한 왕조실록의 기록, 조선 후기 '제주도효제문자도'는 적어도 탐라의 채색화들은 그동안 추사 김정희, 소치 허련을 필두로 한 남종문인화 중심의 미술사를 무색케 하는 소중한 전승들이며, 이번 '제주목도성지도'와 '제주도효제문자도'가 대거 소개되면서 수묵화 중심으로 이해되던 탐라(제주)미술사를 새롭게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다.

#뛰어난 탐라의 채색화

채색화의 아름다움은 먹이 주는 흑백의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어느 날 흑백TV의 버전에서 컬러TV 버전으로 순간 이동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번 예나르 제주공예박물관 개관전은 획기적인 제주미술사 사건으로, 탐라(제주) 채색화의 확실한 실체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마련해 준 전시다. 지금까지 우리가 편견을 가졌던 오방색의 화려함이 어떻게 제주 화가들로 이어졌는지, 그 패턴이 오랜 시간 농축된 색감으로 그 계보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수묵화에서 느낄 수 없는 색채의 맛과 멋은 무한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형태란 사물의 내면을 담고 있는 모습이기에 그 본연(本然)의 색은 시간과 빛, 화가의 사회적 경험과 예술의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앞서 이미선의 원나라 시대 영락궁 삼청전 신선그림 임모에서 보듯, 98년 몽골 지배 아래 놓였던 도교와 불교의 흔적이 여전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문정호의 민간 채색화의 가능성, 작고한 홍성석의 신비로운 색채 표현, 강요배의 중후하면서도 농익은 제주 자연의 색채 표현, 이왈종의 제주에서 찾아낸 화려한 색채 감각, 탐라(제주) 색깔의 독특함들을 '제주목도성지도'와 '제주도효제문자도'의 맥락과 연결 지을 수가 있다. 제주는 섬이 주는 색채의 매력이 있어 다른 지역과 남다르다, 그 섬의 심장에는 피어린 외세의 농단과 핍박의 역사가 화산섬의 독창적인 컬러가 된 것이다. 그 섬에 스민 아픈 시간이, 다시 아름다운 꽃처럼 탐라(제주)의 색채로 피어나는 것은 마치 예술은 고통 속에서 피어나기 위해 우는 화가의 절규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제주공예박물관 양의숙 대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잘한다고 아끼지 않고 지원해주신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저 또한 황혼의 나이에 이 아름다운 그림들을 전시하는 것은 제주도민들과 후학들에게 우리 그림의 연구 토대를 마련해 주는 꿈을 이룬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아름다운 색은 결코 기교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내면의 기운과 역사의식,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것을 오늘 우리는 제주 전통 채색화들에서 배운다. 헛된 이념과 허위의식을 버릴수록 아름다움은 비로소 그 예술의지에서 나온다.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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