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기억의 질감
  • 입력 : 2020. 12.04(금)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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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랑스 여자'의 주인공 미라.

프랑스 영화 '시빌'과 한국 영화 '프랑스 여자'는 닮은 구석이 많은 작품들이다. 두 작품 모두 중년 여성의 욕망과 그것이 발화하는 상황을 세련되고 강렬하게 그려내는 점이 우선 그렇다. 여성 주인공들이 각각 소설가와 배우라는 창작자를 꿈꾸거나 꿈꾸던 사람이라는 직업적 소망도 비슷한 영역 안에 있다. 또한 작품 속에서 중요한 사건을 촉발시키는 욕망의 발화가 과거의 어떤 선명하거나 그렇지 않은 기억들의 침범 때문이라는 부분들도 유사하다. 그녀들은, 우리는 과연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기억해내는 것일까. 지나온 것들은 당연히 명백한 사실이 되고 그것은 온전히 보존되는 것일까.

임솔아 작가의 단편 '희고 둥근 부분'은 맹점과 경계에 대한 흥미롭고도 진지한 탐구다. 사전적 의미로 '맹점'은 '보기신경이 그물막으로 들어오는 곳에 있는 희고 둥근 부분을 말하며 시세포가 없어 빛을 느끼지 못하는 영역이다. 또한 어떠한 일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점을 뜻하기도 한다. 소설 '희고 둥근 부분'의 주인공들은 지독한 병 혹은 지독하게 신경 쓰이는 증상의 어딘가에 놓여 있다. 그들은 또한 정상과 비정상이라고 지어진 경계에 걸쳐져 있거나 누워있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 사이에서 길을 찾기 어려워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임솔아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보았다'라는 착각과 '알고 있다'라는 확증이 도처에서 발생될 때에, 인간을 둘러싼 삶의 조건이 지옥에 가까워지는 걸 느낄 때가 많잖아요"라고 이야기 한다.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이 소설을 보았고 알고 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과연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 내 기억 안의 맹점은 어떤 색과 모양의 부분일까.

'시빌'의 주인공인 '시빌'과 '프랑스 여자' 속 프랑스에 살고 있는 한국 여자 '미라'는 스스로의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 혹은 현재의 자신을 들어내는 과정에서 기억의 왜곡을 거친다. 마치 한밤 중에 열려지는 방문처럼 스스로의 기억은 속수무책으로 당황스럽게 찾아온다. 그런데 너무나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어떤 순간의 앞뒤에는 늘 흐릿하게 상이 맺히는 추측과 짐작만이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어떤 측면에서 기억을 선택한다는 것은 메뉴를 고른다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당장 눈 앞에 놓일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다. 지나간 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무방비 상태로 놓인 옷장을 들여다 보는 일과도 같다. 크게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지만 각각은 뒤섞여 개체가 낼 수 없는 냄새와 모양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을 구별하는 일은 하나의 감각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시빌'과 '프랑스 여자'는 그 기억을 조금 쓸쓸한 질감으로 만들어낸다. 두 작품 모두 그들의 지난 시간을 겨울의 걸음처럼 황망하게 걷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공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두 편의 작품은 나에게는 신기하게도 하나의 상으로 기억된다.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여성의 쓸쓸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들이 각자의 기억을 마주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내가 그들을 어딘가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둘은 같은 재질의 사람이었던 것 같고 엇비슷한 계절의 옷을 입었던 것 같다.

세상의 많은 신비로운 것들이 그렇듯 기억 역시 감성적인 동시에 이성적이다. 기억은 때로는 '기적'이기도 하고 가끔은 필요한 '기능'이기도 하다. 또한 언제나 '불현듯'이기도 하고 매일을 '애써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억은 창작을 위한 신비로운 재료인 동시에 지금의 누군가를 구성하는 물질들의 옷장이기도 하다. 시간은 다르게 적힌다는 말의 질감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계절을 통과하고 있다.

<진명현·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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