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어떡하지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영화觀] 어떡하지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 입력 : 2021. 08.27(금)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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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애의 온도'.

요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푹 빠져 지내고 있다. 헤어진 연인들이 자신의 연애 이력을 숨긴 채 다른 커플들과 함께 한 집에서 지내는 '환승연애'와 이혼한 남녀가 데이트 기간을 거친 후 동거를 선택해 함께 사는 시간을 가져보는 '돌싱글즈'가 그것이다. '사랑의 스튜디오'부터 '짝-애정촌', '우리 결혼했어요' 그리고 몇 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하트 시그널'시리즈까지 대한민국은 오랜 시간 동안 남의 연애의 이력을 사랑해왔다. 거의 쉬어가는 해 없이 모든 방송사에서 연애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해왔으니 지겨울 법도 한데 이상하게 남의 연애를 보는 일은 늘 새롭고 짜릿하다. 특히 비대면 시대를 맞이한 지금 시대에는 방송이긴 하지만 마스크를 벗은 채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웃음과 눈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더 몰입이 쉽고 빠른 것 같기도 하다.

 기존의 연애 리얼리티들에 비해 '환승연애'와 '돌싱글즈' 두 프로그램이 더욱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지점은 이들의 메인 테마가 '이별'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상처일 수도 있고 과거의 흔적 이기도 한 이별이라는 이름의 헤어짐 위에서 다시 시작되는 관계를 지켜보는 일은 여느 데이트 프로그램을 보며 느끼는 설렘과는 또 다른 정서를 전해준다. 애틋하고 안타까운 감정의 폭우가 느닷없이 쏟아지는 이 프로그램들 때문에 '대체 내가 밥 먹다가 남의 연애 보면서 왜 이렇게까지 우는 걸까'하고 난감해하고 있다. 프로그램 속 잊지 못하는 것과 잊지 않는 것을 간직한 채 연애 초년생을 지나버린 사랑 후의 연인들은 자주 주저하고 문득 후회하며 새로운 설렘을 걱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끌림으로 또다시 쉽지 않을 항해를 시작한다. 어쩌면 연애라는 것은 외국어를 배우는 일과도 비슷할 것이다. 나는 낯선 상대의 언어를 배우고 상대는 나의 모국어를 연습한다. 하지만 이 외국어 학습에는 왕도도 선생님도 없다. 둘이 하는 말은 지구 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말이다. 오직 둘만이 이해할 수 있어서 둘만이 소통할 수 있는. 그래서일까 '말이 안 통해서 헤어졌다'는 수많은 이별의 이유들을 떠올려보면 연애에는 독심력보다 문해력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돌싱글즈'의 한 출연자는 전 배우자의 폭언으로 인해 이혼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합당한 이유다 '야 다르고 얘 다르다'. 도대체 어디서 배워 먹은 건지 학력과는 무관하게 못 배운 연애의 말들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도 멋있지 않다. 말만 예쁘게 해도 몇 년은 더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커플들을 주변에서도 꽤 많이 봐왔다. 처음에 눈으로 반한다면 그 후의 관계에서는 많은 것들이 열리고 닫히는 입에 달려있다. 구강 액션이라는 신조어로 홍보하던 영화가 있었는데 구강 액션이라면 바로 이 영화가 떠오른다. 연애의 감칠맛에 전투의 마라향이 더해진 한겨울에 먹는 아주 매운 케이크와 최고로 쓴 커피 같은 영화, 노덕 감독의 '연애의 온도'다.

 사내 커플이자 비밀 연애 3년차인 동희와 영은은 어느 날 헤어진다. 헤어지고 있다. 아니 필사적으로 헤어지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헤어질 수 있는 걸까, 이렇게까지 헤어져야 할까? 세상에 이토록 이별이 힘들다니!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귀다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는 남이 하는 말이다. 사귀다 헤어졌는데 계속 만나야 한다면 휴전 선포 후에도 난데없이 펼쳐지는 기습전이 된다는 것을 '연애의 온도'는 매우 실감나게 보여준다. 이를테면 '미안해, 뭐가 미안해, 그냥 미안해, 그냥이 뭔데, 그냥' 같은 아무 효력 없지만 나름은 의미를 품고 있는 고통스러운 대화들과 '넌 너밖에 모르지, 넌 너만 좋으면 그만이지, 너 같은 걸 내가 왜 사랑했을까' 같은 서슬 퍼런 비수들이 헤어지는 둘 사이에 놓인다. 낭만성을 제거한 현실적인 대사들을 제대로 소화해내는 배우 김민희와 이민기의 뛰어난 연기 그리고 섬세하고 뾰족한 노덕 감독의 연출력이 어우러진 범상하지만 비범한 영화 '연애의 온도'는 그래도 극의 말미에 등장하는 '너 노력 많이 했다, 너도'와 같은 대사들로 후벼 파낸 상대의 마음에 손을 얹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긴 어떻게 사랑이 달콤할 수만 있을까. 우리 모두 그 달콤한 뒤에 남은 텁텁함을 모르지 않는다. 제대로 닦아내지 않은 달콤함의 흔적들은 결국 사랑의 치석이 되고야 만다. 입 안을 맴도는 쓰리고 아린 연애의 이물질들. 차마 뱉어내지 못하는 미련과 아쉬움들. 그래도 이렇게 세심하고 예리하게 연애의 단면을 묘사한 작품들을 만날 때는 나도 모르게 그 비정한 세계에 다시 또 발을 들이게 된다. 남의 연애라는 간접 체험을 이토록 사랑하는 나를 보면서, 유명한 인기 가요의 제목을 바꾸어 보았다. "어떡하지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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