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희망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꿈을 펼치기 위해 익숙한 일상을 뒤로하고 주저없이 제주행을 선택한 이들. 그들은 제주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있을까. ‘제주에 둥지를 틀다’란 이름으로 제주사람들보다 더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공간을 마련했다.
겨울 날씨 같지 않았다. 언땅 녹이는 봄볕같은 햇살이 무더기로 땅위에 내려앉은 날, 전홍식(43) 김이선씨(40)부부를 만나러 갔다.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어 겨울에는 붉은 색을, 여름에는 마을나무들에서 뿜어져나오는 싱그런 초록색을, 가을이 깊어갈 무렵엔 밭에서 익어가는 감귤의 노란색을 만날 수 있는 마을. 북제주군 한경면 산양리에 있는 옛 산양분교장이 이들 부부의 보금자리였다. 버려지다시피 했던 분교장 건물은 훌륭한 살림집이자 작업실이자 화실로 바뀌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생기를 잃었던 건물을 사람 살만한 공간으로 다듬고 고치느라 밤낮으로 손과 발을 움직였을 두 사람의 지난 일과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이들 부부가 부산에서 제주로 온 데는 딱히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게 아니다. 전홍식씨는 판화 회화 설치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술 작업을 벌여온 작가였고, 김이선씨는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굵직굵직한 전시회를 기획하던 이였다. 김이선씨의 경우엔 어릴적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조천을 찾았던 기억은 있지만 제주로 가서 살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부부는 환경조형물 제작건으로 몇차례 제주를 방문하다 활동무대를 옮겨 이곳에서 작업을 계속해보자는 생각으로 어려움없이 결심을 굳혔다. 그때가 97년이었다.
북군 구좌읍 평대리 ‘자그맣고 이쁜’ 시골집에서 살다 애월읍의 옛 어음분교장에 짐을 푼게 그로부터 2년 뒤인 99년. 어음분교장 시절은 부부에게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이들이 차린 오름조형연구소 주최로 2000년 7월 어음분교장에서 ‘아름다운 우리마을전’을 열고 흉물스럽게 방치됐던 폐교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10년 이상 부산에서 미술전을 기획하면서 덩어리만 컸지, 미술작품이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다가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고민같은 게 생겨났다. 폐교된 분교장은 다소 의외의 전시공간이지만 관람객들이 제주의 자연속에서 미술품을 대하는 느낌은 남다를 것 같았다.”(김이선)
3개월 가깝게 이어진 마을전은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서울 부산 전북 등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중산간 마을의 분교장에서 며칠동안 설치작품을 준비하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눈길을 끌었다. 이 낯선 풍경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 익어갈 무렵 이들은 폐교된 신창중학교와 산양분교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창중학교를 개조한 예올문화원에서 국제판화제를 개최했고, 산양분교장에서 두 차례 ‘아름다운 마을전’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 부부는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해를 거르지 않고 국제판화제와 마을전을 열기에는 재정이 넉넉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반찬값이라도 벌어볼 생각으로 감귤따는 일을 해볼까 했다. 하지만 시세가 좋지 않아 사람을 안쓴다는 말에 오히려 감귤농사 짓기 어렵겠다며 마을사람들에 대한 걱정만 늘었다. 그렇다고 두 행사중 하나를 포기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대신 새로운 일을 구상하기보다 기존의 사업을 내실화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격년제로 운영하더라도 초심을 잃지 말자는 거다.
“제주에 왔을때 이곳에서 오래도록 작업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 바람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일에 몰두할 수 있어서 좋다. 마을전은 한 두 번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지속적으로 마을사람들과 교감하면서 함께 참여하는 분위기로 끌어가야 한다. 아마 5년쯤 지났을때는 마을의 잔치가 되지 않을까. 국제판화제 역시 마찬가지다. 회를 거듭하면서 알찬 행사로 커나갈 수 있도록 다음 행사를 착실히 준비해나갈 것이다.”(전홍식)
문득, 이들이 제주사람들에게 전하는 문화의 향기는 ‘기다림과 여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제주에서 열렸던 몇몇 문화행사들이 적지 않은 예산을 들이면서도 준비 기간이 지나치게 짧고, 몇달 안에 그럴듯한 성과를 기대했던 것은 아닌지. 찬바람의 기세가 주춤했던 어느 겨울날, 이들 부부가 가만가만 건넨 이야기다. /진선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