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환상숲길'을 가다(14)]제5코스-관음사야영장~탐라계곡~충혼묘지~천아수원지

[한라산 '환상숲길'을 가다(14)]제5코스-관음사야영장~탐라계곡~충혼묘지~천아수원지
초록 숲길과 자연전망대인 목장길의 조화 장관
  • 입력 : 2009. 07.09(목)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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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야영장에서 천아수원지 입구로 이어지는 한라산 숲길에선 제주시내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지는 목장길의 전망대가 장관이다. /사진=강경민기자 gmkang@hallailbo.co.kr

1970년대 중반 구축한 '돌담 방화선' 흔적 뚜렷

방선문~용연 잇는 한천 상류인 탐라계곡 관통

축산과학원 목장길서 조선시대 4소장터도 확인


한라산 환상숲길 탐사대는 관음사 야영장을 출발해 제주시 충혼묘지를 거쳐 천아수원지 입구까지 탐사를 이어갔다.

관음사 야영장을 출발한 탐사대를 맞이한 건 이전 코스에서도 줄곧 이어졌던 튼튼한 돌담길이다. 돌담길은 1970년대 중반 약 3년여간 산림청 소관 한라산 국유림을 보호하기 위해 국유림 경계지를 빙 에워쌓은 방화선이다.

제주도 산림정책과장으로 퇴임(2000년)한 이용언씨는 한라산 자락의 돌담 방화선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라산 '환상숲길'을 가다(14)]제5코스-관음사야영장~탐라계곡~충혼묘지~천아수원지



이씨는 "1974년쯤부터 산림청의 국비재배정사업으로 돌담 방화선을 구축했다. 당시 조림이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한라산 국유림 경계지 부근의 목장지대에서 산불이 자주 발생해 국유림 보호를 위해 주변에 흩어진 돌들을 모아 방화선을 쌓았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돌담 방화선 외에도 불길이 방화선을 넘어 국유림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삽과 곡괭이로 2m 간격으로 흙을 쌓고, 해마다 돌담 보수공사와 풀베기작업을 벌였다고 이씨는 말한다.

무성한 조릿대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을 따라걷자 숲길은 제주시의 대표적 명소인 방선문을 지나 용연에 이르는 한천의 상류인 탐라계곡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라산 정상부에서 발원한 탐라계곡은 양벽이 깊고 웅장한 맛이 으뜸이다.

해발 500~600m 사이에 펼쳐지는 숲길에서 맛볼 수 있는 또다른 묘미는 자연전망대가 주는 즐거움이다. 계속되는 숲길이 지루하다 싶을 즈음 시야가 확 트이는 목장길이 탐사대를 맞는다. 바로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 목장이다.

목장길에선 제주시내를 한 눈에 품을 수 있다. 제주의 관문인 제주공항에서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모습에서부터 별도봉, 도두봉, 열안지오름, 거문오름, 남조순, 민오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목장길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 초록빛 숲이 인간에게 베풀어주는 커다란 휴식처인 그늘의 고마움도 새삼 깨닫게 한다.

탐사대는 목장길을 걷다 조선시대 10소장 가운데 4소장터였음을 말해주는 기록을 목장내 묘지 비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제주도는 일찍이 말(馬)의 고장으로 국마(國馬)의 보고였다. 조선시대 목장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10개 소장으로 나눠 국마와 사마를 방목했다.

남도영의 '제주도 목장사'(2003년)에는 "제주도 목장에서 생산된 말은 공마로 바쳐졌는데 평년 288~300필, 3년 1회의 식년에는 300필이 추가돼 600필이 진상됐다. 고려말, 조선초에 명(明)의 요구로 약 9만필의 말을 보냈는데 그 중 60% 이상을 제주도에서 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제주도 목장이 역대 왕조를 유지 발전시키는 톡톡한 역할을 해낸 셈이다.

또 책에선 10소장의 유래도 적고 있다. "태종 18년 이후에는 평지를 많이 개간하여 말의 사료로 필요한 수초가 부족하고, 권세가의 집 말이 농경지를 짓밟아 대책이 필요하게 됐다. 세종 11년 제주출신 고득종은 한라산 중턱 약 4식(120리) 되는 땅에 목장을 건설해 공·사마를 들여보내 방목토록 건의했고, 조정에서는 상호군(上護軍)을 파견해 그 적부를 조사케 하고 한라산 중턱에 돌로 주위 165리의 담장을 쌓아 세종 12년 2월9일에 목장을 설치해 10개 목장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숲길은 호국영령들이 잠들어있는 제주시 충혼묘지와 베트남 참전위령탑, 조계종 사찰인 천왕사 입구를 가로질러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이어서 어승생악과 아흔아홉골 사이의 선녀폭포를 타고 흐르는 어승생 도수로를 지난다.

/특별취재팀

[전문가 리포트]목장사의 터전, 십소장(十所場)

십소장은 18세기초인 숙종대 제주목사 송정규(宋廷奎)가 한라산지 여러 곳에 산재하여 운영상에 문제가 있었던 목장들을 10개로 재정비하면서 등장한 것이다. 십소장은 조선시대 내내 국가가 운영했던 국마장으로, 해발 200~600m 일대에 입지했다.

하나의 소장 안에는 여러 소규모 자목장(字牧場)들이 있었다. 십소장은 감목관, 마감, 군두, 군부, 목자(테우리)로 구성되는 마정(馬政)조직에 의해 철저히 운영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말들은 해마다 조정에 진상되어 널리 명성을 얻었다. 각 소장에서 선정된 공마들은 제주목 관아로 옮겨져 제주목사의 최종 확인을 거친 다음 화북포, 조천포, 애월포에서 남풍을 이용해 육지부로 운송되었다.

십소장은 삽읍별로 분할, 배치되었다. 제주목 지역에는 1소장부터 6소장까지, 대정현 지역에는 7소장과 8소장, 정의현 지역에는 9소장과 10소장이 자리잡았다. 제주목 1소장은 구좌읍 중산간, 2소장은 조천읍 중산간, 3소장은 제주시 회천동~오등동 중산간, 4소장은 제주시 연동(한천)~해안동(외도천) 중산간, 5소장은 애월읍 광령리~유수암리 중산간, 6소장은 애월읍 어음리~한림읍 금악리 중산간에 있었다. 대정현 지역에서 7소장은 안덕면 중산간, 8소장은 구중문면 중산간, 그리고 정의현 지역에서 9소장은 서귀포시 호근동(고근산)~남원읍 중산간(서중천), 10소장은 표선면 성읍리 영주산 일대에 위치했다. 이러한 각 소장별 위치는 조선시대 제주도 중산간 목장지대가 어떻게 구분되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갑오개혁(1894) 이후 감목관제와 공마제도가 폐지되면서 십소장들이 폐장되었다. 십소장은 제주도 목장사와 목축문화의 산실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제주사는 곧 목장사라 할 정도였으며, 십소장에 방목했던 우마들을 관리하기 위해 다양한 목축문화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소장이라는 용어는 현재도 중산간 마을 촌로들이 사용하고 있다. 무속신화인 '세경본풀이'에도 소장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하천이름에도 소장이 등장한다. 제주시 삼양동과 화북동 경계하천인 삼수천이 그것이다. 삼수천이라는 명칭은 삼소장 목장을 흐르는 하천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천이름에도 목장사가 담겨있는 것이다. 소장(마을 촌로들은 '수장'이라고도 한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세대들이 줄어드는 현실을 감안할 때 전통문화의 계승 차원에서 소장이라는 용어를 사회일반에서 다시 사용하기를 제안한다.

제주시 관음사 야영장에서 천왕사 방향으로 난 숲길을 답사하다 보면 4소장을 만난다. 열안지 오름 남쪽 한라산관광도로(1117번도로)변 국립축산진흥원 시험방목지에서 4소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당시 목장규모는 동서 18리, 남북 15리 정도였다('耽羅故事'). 4소장은 해발 300~600m 일대 제주시 오라2동 한천부터 시작하여 해안동 외도천까지였다. 이 목장 내에는 열안지오름, 노루생이, 거문오름, 한천, 도근천, 외도천이 있다. 행정구역상 오라동, 연동, 해안동 중산간에 해당되며 해안동에는 하잣성 흔적이 남아 있다. 시험방목지에 있는 묘지 비석에는 '四所場'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여 이곳의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강만익 세화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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