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901년,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독일 기자이자 지리학자인 지그프리트 겐테는 서양인으로는 한라산을 처음 등정했으며 한라산의 높이가 1950m 라는 사실도 처음 측정, 밝혀냈다. /사진=한라일보 DB
이재수난 직후 제주행… 무장 호위병 대동한 채 등정등정기 "한라산 분화구 호숫가엔 야생마들 풀 뜯어"
"마지막 300m 구간을 오르기 위해 두시간 반 동안 사투를 벌였다. 숨이 막히고 땀이 흘러내렸다. 숨을 헐떡거리며 분화구 가장자리에 쓰러져 잠시 모든 것을 잊었다. 드디어 정상이다. 사방으로 웅장하고 환상적인 장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섬을 지나 저 멀리 바다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파노라마였다."
"제주도 한라산처럼 형용할 수 없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광경을 제공하는 곳은 지상에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이다. 바다 한 가운데 솟아 있는 한라산은 육지에서 100km 이상 떨어져 있다. 전망이 좋은 높은 산에서도 주변의 시야가 가려 한눈에 보기 힘들지만, 거칠 것 없이 펼쳐진 바다 위로 가파르게 우뚝 솟은 한라산 정상에서는 확 트인 시야에 온 사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아네로이드 기압계로 신중하게 측정해본 결과 분화구 맨 가장자리 높이는 해발 1950m다. 참고하기 위해 꺼낸 영국산 기압계는 6390피트를 가리킨다. 그동안 측정기로 재어본 것이 거의 다 맞는다는 의미다. 이런 높은 산이 끝없이 넓은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다고 상상해 보시라."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901년,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독일 기자이자 지리학자인 지그프리트 겐테는 한라산 등정과 높이 측정 당시를 이렇게 묘사했다. 겐테는 서양인으로 한라산을 처음 등정했으며 한라산의 높이가 1950m 라는 사실도 처음 측정해 밝혀낸 인물이다. 퀼른신문에 연재한 겐테의 조선 여행기는 동료 기자였던 베게너에 의해 1905년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여행기의 원문을 권영경씨가 '독일인 겐테가 본 신선한 나라 조선, 1901'(2007년)이란 제목으로 옮긴 것이다. 권 씨 이전에도 겐테의 여행기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소개됐다. 이 여행기를 통해 겐테의 한라산 등정 당시의 상황이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 이재수난 직후 한라산 등정
권씨는 번역서 말미에 겐테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겐테는 특파원으로 1900년 가을, 중국에 파견됐으며, 이듬해 6월 조선으로 향한다. 겐테의 조선 여행기는 모두 4부로 구성돼 있다. 중국에서 서해안을 거쳐 제물포로 들어와 강원도 내륙의 당고개 금광과 금강산을 횡단해 동해안에 이르는 과정, 서울에 체류하면서 서민들의 삶과 궁중생활, 마지막으로 제주도로 가서 한라산 정상까지 등반 후 돛단배로 목포에 이르는 위험한 모험을 다루고 있다.
그는 중국을 경유 한국에 오자마자 황실고문인 미국인 샌즈를 만나 제주에 관한 예비지식을 얻고, 제주목사에게 보일 소개장과 통행증을 발급받고 제주로 내려 온다. 그의 짐속에는 사진장비와 망원경·기압계와 도구들로 가득찼다. 겐테가 제주를 찾은 시기는 '이재수의 난' 직후로 민심이 흉흉하던 시절이었다. 그를 만난 제주목사는 한라산 등반을 만류했다.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사는 겐테의 간곡한 희망에 황제가 파견한 무장병력 몇 명을 호위병으로 딸려 보내 그를 보호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준비와 안전조치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에게 두루 알리기 위해 섬안의 모든 관청에다 한라산을 등반해 사진을 찍고 측량하기 위해 외국인 섬으로 들어왔다는 내용의 파발을 띄웠다. 목사에게는 미리 고도 측정의 비법을 설명해주고, 사진기의 무해함을 확인시켜 주었다. 목사는 백방으로 수소문해,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을 한 명 보냈다. 겐테의 표현처럼 "이제야 말로 계속되는 목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준비해온 등반을 실행할 시점이 된 것"이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맑고 청명한 하늘이 그를 유혹했다. 기압계도 꾸준히 올라가서 모든 조건이 신기할 정도로 맞아 떨어졌다. 완벽한 기회였다. 그의 한라산 등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 "한라산 등정 내 생애 최고의 영광"
겐테는 영실을 통해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드디어 한라산 정상에 오른다. "백인은 아직 한번도 오르지 못한 한라산 등정은 내 생애 최고의 영광"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250년전 난파된 네덜란드인들이 처음 보았던 이 산을 온갖 인내와 끈기로 정상에 오르고, 스케치하고 사진으로 남기며 또한 고도를 측량한 자신을 스스로 대견스러워 한다.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발 아래 지도처럼 놓여 있는 섬에서 환상적인 둥근 아치형의 푸른 바다로 향했다. "누가 이곳 정상의 대기에서 바다를 찾았겠는가. 여기서만 볼 수 있는 신기한 현상이다. 불가사의하게 시야가 확 트이는 정말 놀라운 현상이다. 바다가 하늘로 올라온 듯 하다. 해수면에서 거의 2000m 높이에 이르는 이곳까지 전체 수면이 활짝 열리고, 우리의 눈높이까지 밀려온 것 같다."
겐테는 산정 분화구인 백록담의 풍경도 묘사했다. "분화구 바닥에는 겨울 잔설이 있는 웅덩이보다 별로 크지 않은 호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주민들은 호수가 상당히 깊어 그 아래에는 지하세계로 가는 통로가 있다고 주장했다. 화산이 폭발할 때 갈라진 깊은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호숫가에는 난쟁이처럼 작고 튼튼해 보이는 야생마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육지에서 제주도는 야생마의 원산지로 유명하다. 바람막이가 되는 분화구 근처에서 말똥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평소 단련된 말들은 이곳 높은 산 정상에서 밤을 보낸다는 표시였다."
[겐테와 수행굴]한라산 영실 천연동굴서 밤새워
벌목꾼·일행 포함 30여명…본지 탐사팀, 수행굴 확인
본보 한라산대탐사팀은 지난 2001년 1월 영실 일대에 대한 탐사도중 석굴을 발견했다. 몇일후에는 관계 전문가들의 확인작업을 거쳐 그간 기록과 구전으로 전해 오면서도 실체가 감추어졌던, 제주도내 가장 오랜 사찰인 존자암의 옛터로 추정되는 영실의 '수행굴(修行窟)'임을 밝혀냈다. 탐사 결과는 제주불교의 원류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영실 동남쪽에 위치한 이 석굴의 길이는 약 28m로 40여명 정도가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규모다. 이 굴속에는 고려말∼조선조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청자·백자·기와편은 물론 각종 옹기 파편들이 널려 있었다.
▲겐테가 20세기초 한라산 등정길에 묵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영실 인근 수행굴.
이 굴이 탐사팀의 호기심을 자극한 또다른 이유는 한라산 높이를 1950m라고 최초로 측정했던 독일 지리학자이자 '퀼른신문'의 특파원이기도 했던 겐테가 등정·하산길에 벌목꾼들과 함께 이틀밤을 묵었던 지점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실제로 겐테의 유품으로 보이는 서양풍의 잉크병과 술병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영실코스로 한라산 등정에 오르던 겐테 일행은 날이 저물고 진을 다 뺀 뒤 우연히 만난 벌목꾼들로 인해 동굴속에서 묵게 된다. 그는 행군을 멈추고 바위 깊숙이 뻗어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겐테의 여행기에는 이 굴을 "안을 들여다보려면 몸을 굽혀야 했다. 동굴은 중간 키 정도의 남자도 안에서 똑바로 설 수 없는 높이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겐테는 동굴속에서 눈에 띄게 떨어지는 실내 온기를 대신해 스물세명의 벌목꾼과 나의 일행 열두명에게 비축해 둔 코냑과 담배를 나누어 주었다. "모든 불신은 사라지고 이 순간 나는 한라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 된 것이 분명했다."
겐테는 동굴속에서 밤을 보낸 뒤 길도 인적도 없는 원시림을 헤치고 오백장군이 있는 영실기암을 지나 드디어 한라산 정상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