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옷 원단 고급화로 다양한 패션 창조
제주왕벚꽃축제선 패션쇼도 선봬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는 햇살 뜨거운 여름이 되면 땡감을 모아 감물을 들였다. 상(喪)중에 입었던 무명치마부터 머리에 썼던 삼베 두건을 이어붙인 넓은 갈천은 시원한 이불과 옷으로 변신했다. 선명하지 못해 오히려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은은한 그 빛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자연에서 색을 빌리고 빛과 바람, 시간이 빚어낸 천연염색의 가치를 많은 이들이 알게 된 것이다.
이같은 변화 때문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이가 있다. 40년 넘게 한복을 만들며 31년간 서문공설시장에서 '크로바 전통 한복'을 운영하는 김순복(53)씨가 그 주인공이다. 척추이상에도 불구하고 천연염색에 대한 열정으로 여주를 비롯해 이곳저곳을 오가던 그는 최근 가게 옆에 천연염색 전시판매장 '네나도록'문을 열었다. 그는 갈옷의 색과 패션을 과감하게 바꾸고 원단의 고급화를 통해 다채로운 천연염색 의류를 만들어낸다. 천연염색제품은 가방과 침구까지 다양하다.
"초여름부터 추석 때까지가 가장 바쁘죠. 더울 때 원단을 빨아서 풀을 빼고 염색하고, 말리기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힘에 부치지만 가족들이 모두 도와주니 힘들지 않아요."
이처럼 그의 뒤에는 늘 가족들의 지원이 있었다.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였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풀을 뽑아다가 주면서 '엄마, 이것도 넣고 끓여보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늘 여러가지 식물로 염색을 하는 엄마에게 주는 선물이었죠." 남편은 염색재료 수거 등 힘든 일을 도맡는다.
기자가 갔던 지난 27일 가게에는 제주어 노래꾼 양정원씨가 있었다. "몇해전 공연때 입을 옷을 사러 왔는데 가장 싼 것을 찾더라구요.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고 무대에서 입을 옷을 찾는다고 하길래 좋은 옷을 그냥 드렸어요." 이렇게 둘의 인연은 시작됐고 후원인으로 어려운 노래꾼에게 의상을 제공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이주여성을 위한 염색체험 등 다양한 나눔활동도 앞장선다.
그는 2006년부터 '제주 왕벚꽃 축제'에서 특별한 지원 없이 자비를 들여 갈옷 패션쇼를 하고 있다. 그가 패션쇼를 하게 된 데는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6년전쯤 우리 가게에서 옷을 잔뜩 가져간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축제행사장에 가봤더니 바로 제 옷으로 패션쇼를 하더라구요. 옷값도 제대로 받지 못했죠. 그런데 축제 기획자가 물어물어 저를 찾아온 겁니다. 그분의 제안으로 그 이듬해부터 패션쇼를 이어오고 있어요." 어릴 적 엄마에게 풀을 뽑아다 줬던 아들은 작년부터 모델로 엄마의 패션쇼 무대에 서고 있다.
천연염색을 통해 몇가지의 색을 낼 수 있냐는 물음에 그는 "감태 등 해초류부터 쑥, 밤껍질, 모시풀, 나무뿌리, 홍화, 치자. 양파껍질 등 천연재료의 종류도 다르고 매염제, 바람과 햇빛과 물에 따라 색이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셀 수 없다"고 했다. 무엇이든 천연염색이 가능하다는 그는 "'쥐똥'도 말려서 염색을 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는 언젠가 넓은 땅을 사서 감나무를 심고 천연염색 박물관과 체험관을 운영하는 꿈도 갖고 있다. 그리고 루앙시 등 해외에서도 제주갈옷과 천연염색을 알리는 패션쇼를 열고 싶은 마음도 있다. 희망을 이루기 위한 준비도 차곡차곡 하고 있었다. 긍정적인 그에게 조심스럽게 장애에 대해 물었다. "사춘기에는 방황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나자신을 낮추고 살 수 있도록, 세상을 깊게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면에서 그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