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이 소장한 조정철의 문집 '정헌영해처감록' 표지와 속지.
혹독한 감시 속에서 병들고 굶주린 채 연명"욕보이는 것 능사로 삼아" 시로 울분 토해
1775년 8월 16일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올랐던 조정철은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정확히 2년 후인 1777년 8월 16일 정조 시해 음모사건에 휘말려 포박당해 형틀에 묶였다. 고초를 겪고 나서 안치된 절해고도 유배지에서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형은 면했지만 대역죄에 연루됐기 때문에 혹독한 감시하에서 집 밖 출입이 원천 차단되고, 독서도 금지됐다.
"새로 온 제주목사 김영수가 책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는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의 뜻은 이미 볼 수 없게 되었다." 부친의 상 중에 반역죄로 집안이 풍비박산되고 자신은 유배된데다 핏덩이를 남겨놓고 아내가 자결까지 한 상황에서 그가 의지할 것은 오로지 책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주목사는 그마저도 가로막아 그의 정신세계는 극도로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정철이 유배된 후인 1778년 12월 제주에 도임한 김영수 목사는 1781년 2월 이임할 때까지 조정철을 괴롭혔다. 그는 훗날 문집 '정헌영해처감록'에 유배 당시의 처절했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해놓았다.
"김영수가 목사로 임용되고서부터 조정의 뜻을 본받지 않고, 오직 죄 지은 유배인을 침범하며 욕보이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권세 부리는 비장과 흉포한 하급관리가 날마다 살피고 간사한 장교와 교활한 관리가 가는 곳마다 두렵게 행동을 하니 보수주인(안치죄인을 감호하는 주인)에게 공갈해 음식을 엄중히 단속하는 일 같은 것은 오히려 하찮은 일 중에 작은 일에 속한다. 닭, 돼지, 물고기 등을 보면 병들거나 늙어 죽은 것이어도 날로 먹으면서 공문서가 도착하면 갈 뿐인데 하물며 사람의 출입을 막으면서 집 마당을 못 나가게 하는 위협에 눌려 한결같이 3년을 근신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조정철의 후손인 양주조씨 집안에서는 경상북도 상주시 소재 사당 함녕제(1)에 조정철과 홍윤애의 위패(2)를 모시고 추념비(3)까지 세워 그들의 사랑을 기리고 있다.
유배죄인은 한 달에 한 번씩 관아를 방문해 유배지를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또 다른 역모죄를 꾸미는 것은 아닌지 기찰을 받는 이른바 '고점(考點)'을 거쳐야 했다. 다른 많은 유배인들의 사례를 보면 고점은 형식에 불과했는데도 유독 조정철에게만은 치욕스런 고점이 반복됐다.
하급관리의 호통에 놀라 새벽 잠자리에서 깨어난 그는 관청마당으로 불려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김영수는 조정철의 적거지 보수주인을 불러들여 온돌을 때지 못하게 하고, 제대로 된 음식도 못 먹게 했으며, 관리를 시켜 불시에 적거지를 들이닥치게 했다. 다른 유배인들에게는 일찍이 없었던 법 조항을 내세워 철저하게 감시했던 것이다.
결국 조정철은 풍토병에 병들고 굶주려 초췌한 얼굴에 비쩍 마른 몸뚱이로 하루하루를 연명해갔다. 뱃속에서는 우렛소리가 들릴 만큼 곤궁했지만 김영수는 "조정철의 얼굴이 통통해지고 색깔이 두툼해졌으니 반드시 쌀밥을 먹은 것일 터이니 그 출처를 찾아내야겠다"며 비장으로 하여금 사방으로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것도 모자라 당시 목사와 판관은 그가 쌀밥을 먹는지 의심해 직접 유배지를 찾아가 몰래 밥 먹는 모습을 훔쳐보기도 했다.
"옛날의 나나 지금의 나나 똑같거늘 앞에서 엿보고 뒤에서 엿보네." 참으로 가혹한 감시와 학대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해야 시를 지어 슬픔을 표시하고 울분을 토하는 것이었다. "모든 일 견디며 웃어버리고", "갖가지 고달픔 도리어 웃음으로 견디니"와 같은 시구는 희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역설적 표현이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과 마음은 더욱 피폐해졌다. 영양실조로 머리는 빠져갔으며, 아침에 일어나고서는 이가 빠진 것을 보고 벽에 기대어 쇠약해짐을 한탄하는 일도 잦아졌다. 조정철은 "날마다 부정이나 없나 캐내려 하나 나는 걱정될 게 없다"고 자위하면서도 "죽어도 미련이 없지만 억울함이 너무 크다"고 시를 써 남기고 있다.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무렵 그를 구원한 것은 제주여인 홍윤애였다.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처럼, 거친 돌투성이 속에서도 강한 생존력을 내뿜는 수선화처럼 그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사랑의 싹을 키워갔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