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묵었던 니시무라(西村) 여관의 전경이 담긴 동판화. 박영효는 당시 고종의 명으로 새로 만든 국기를 여관 누각에 내걸었다고 기록해놓았다. 사진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철종 무남독녀 영혜옹주와 혼인 3개월만에 사별정1품 작위·안락한 삶 대신 개화파 거두로 활동
▲조선 철종의 부마 박영효. 사진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영효(朴泳孝·1861~1939)는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의 부마(駙馬·사위)로 11세에 철종의 무남독녀 영혜옹주와 혼인했다. 그러나 순탄치 않은 그의 인생역정을 암시라도 하듯이 당시 13세였던 영혜옹주는 혼인 3개월 만에 자식도 없이 요절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국왕의 사위에게 주던 명예직인 정1품 금릉위(錦陵尉)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라는 영예로운 작위가 평생 따라다녔지만 왕실의 법도에 따라 재혼할 수 없었다. 한양에서는 물론 망명지인 일본이나 유배지인 제주 등지에서 여러 여인과 염문을 뿌렸으나 정식으로 인정된 부인은 없고 자식들은 모두 서출의 신분에 머물러야 했다.
지난 2008년 2월, 독립기념관은 1882년 박영효가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태극기 원형을 그대로 그린 자료를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태극기는 현재의 태극기처럼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칠하고, 네 모서리에는 건(乾)·곤(坤)·감(坎)·리(離)의 4괘(四卦)가 그려져 있었다. 이 태극기 원형의 발굴은 이후 이보다 앞선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고종황제의 지시에 의해 이미 태극기가 만들어져 사용됐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최초 국기 여부를 놓고 학계에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최초 제작 여부를 떠나 박영효가 처음으로 태극기를 외국에서 사용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박영효는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와서 쓴 사화기략(使和記略)에 태극기 제작 및 사용 경위를 기록해놓고 있다.
"새로 만든 국기를 묵고 있는 누각에 달았다. 기는 흰 바탕으로 네모졌는데 세로는 가로의 5분의 2에 미치지 못하였다.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색칠을 하고 네 모서리에는 건곤감이의 사괘를 그렸는데 이것은 이전에 상께 명령을 받은 적이 있다."
한 나라 국왕의 사위였던 인물답지 않게 그는 급진 개화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큰형 박영교를 따라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오경석 등 개화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고종 16년)에는 김옥균·서광범 등과 개화당을 조직했다. 왕실 법도에 묶여 활동이 제약적일 수밖에 없는 박영효에게 고종은 여러 혜택을 베풀어 18세에 오위도총부도총관, 19세에 혜민서제조, 20세에 판의금부사에 임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락한 삶에 안주하기에 그의 사상은 이미 성숙해 있었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시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정치적 혁신을 통해 부강한 조선을 꿈꾸며 우국 청년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 무렵 조선은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이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며, 개화파와 수구파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이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반해 구식군대인 무위영·장어영 군병들은 열 세달 동안이나 밀린 봉급(쌀)을 모래가 섞인 쌀로 배급받게 되자 불만이 폭발한다. 1882년 6월, 이들은 폭동을 일으켜 포도청과 의금부를 습격하고, 무기를 빼앗아 일본 공사관으로 쳐들어 갔다. 대원군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지만 청·일의 개입으로 대원군 정권은 33일 만에 무너지고 만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청나라의 노골적 간섭을 불러들이고, 일본은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압박한다. 1892년 9월, 박영효는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을 협의하기 위한 특명 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임명돼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일본에 머물던 박영효는 메이지유신으로 짧은 기간에 근대화를 일궈낸 일본의 재무, 산업 분야 근대화시설을 돌아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유럽과 미국의 외교사절을 만나면서 조선의 자주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개화가 필수적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1883년 초 귀국한 뒤에는 한성판윤에 임명돼 신식 경찰제도 도입, 도로 정비 사업, 유색의복 장려 등 일련의 개화 시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신문제작 문물을 목격한 그는 국민계몽 차원에서 신문을 발간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귀국길에 일본인 인쇄공과 기자를 데리고 와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사상을 실천으로 옮길 줄 아는 시대의 지성이었다. 1884년 12월 4일 그는 청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해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과 함께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건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