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사를 오가는 잿빛 옷을 입은 스님의 가벼운 발걸음과 해송림이 고즈넉하다. 이현숙기자
100여년 서귀포천주교 역사 담긴 '하논성당터' 찍고하늘 높이 솟은 해송림에 습지 곳곳엔 수생식물 가득
우리가 살고 있는 어느 곳이든 나름대로 의미를 갖지 않는 곳이 없겠지만, 빙하기 이후 5만년 동안 지구생명체의 비밀을 품고 있는 '하논 분화구'는 더없이 각별하다. '수만년전 생태계 타임캡슐'을 품고 있는 하논분화구는 화산섬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 자원이다. 분화구 밑바닥 땅 속을 연구해 오래된 모습을 추론해내는 작업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 분화구를 한바퀴 돌아 걸어보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하논 분화구 전경.
'하논'은 큰 논을 뜻하는 우리말 '한 논'에서 유래하고 있다. 하논은 화구(火口)의 둘레가 둥근 꼴의 작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 화산으로 산굼부리 분화구와 함께 제주도 지역의 대표적인 마르형(型) 분화구이다. 5만년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르형 화산지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대형 분화구이자 이중화산이다. 바닥에는 5만여 년 동안 형성된 깊이 7m의 습지 퇴적층이 있어 시대에 따른 식생과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하논분화구는 서귀포시 삼매봉 북쪽 서홍동·호근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분화구 바닥 면적은 21만6000㎡이며 이를 포함한 전체 면적은 126만6825㎡이다. 해발고도는 분화구 바닥 53m, 사면정상부 143.4m로 약 90m의 차이를 보인다. 둘레는 3.7km에 이른다. 분화구 바닥은 오랜 기간 논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소규모의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분화구 중앙에 있는 보롬이 주변과 분화구 사면에는 과수원 등 경작지와 곰솔림 등이 분포하고 있다.
하논분화구를 한바퀴 돌아보는 방법은 '하논입구길'에서 시작해도 되고, 서귀포여자중학교 건너편에 설치된 '하논 전망대'에서 출발해도 된다. 하논입구길 표지판은 조가비박물관 건너편에 돌로 만든 '호근입구' 표시판과 함께 있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3갈래 골목길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 예쁜 과수원이 보이는 왼쪽 골목길(하논로 72번길)로 들어간다. 오래된 자그마한 농로길을 새소리를 들으며 계속 걷다보면 '하논성당터' 표시판이 나온다.
▲하논성당터 안내문.
'하논성당터' 옆에 있는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주 오래된 소나무와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인다. 이 두 나무 사이에 오래된 집터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1900년 6월12일 설립되었던 하논성당 터로, 1899년 5월 프랑스 선교사 페레 주임신부의 보좌 신부로 제주에 들어온 김원영 신부가 1900년 6월12일 서귀포시 하논 지역에 초가집 성당을 세운 곳이다.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성당인 셈이다.
'담쟁이길'은 하논생태길을 지나면 처음에 들어갔던 하논입구로 다시 돌아 나오게 된다. 여기에서 오른쪽 골목(하논로 67번길)으로 들어가면 좁고 아름다운 옛 길인 담쟁이길이 나온다. 겨우 경운기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골목길에 있는 오래된 돌담에 담쟁이들이 얼키고 설켜지면서 감귤과수원을 지키고 있다. 분화구 내에는 오랫동안 경작을 하지 않는 논이 늘고 있으며 휴경지에서는 부들, 송리고랭이, 줄 등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다.
▲담쟁이돌담 사이의 과수원길
하논 분화구를 한바퀴 돌고 아쉬움이 남는다면 총 10.6㎞로 이뤄진 '하논성당 길'에 도전하면 된다. '하논생태길'은 천주교 순례길인 '하논성당 길-환희의 길' 10.6㎞에도 포함되어 있다. '하논성당 길'은 서귀포 천주교 신앙의 모태였던 하논성당과 홍로성당이 있던 곳으로, 신축교인의 아픔을 간직한 제주 천주교사의 중요한 성지다. 서귀포성당에서 시작, 하논 성당터~하논 생태길~솜반내~흙담소나무길~홍로현 현청길~지장샘~홍로 성당 터~면형의 집~서귀 복자 성당~복자 성당 터를 지나 서귀포 성당으로 돌아오는 전체 코스를 걸어보는 것도 좋다. '하논성당 길'은 신앙·제주문화·자연경관이 어우러진 말 그대로 '환희의 길'이다.
하논분화구를 돌아 걷는 길은 제주올레길과 만나기도 한다. 이 뿐이 아니다. 인근에 있는 어린이집 담장을 넘어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봉림사를 오가는 잿빛 옷을 입은 스님들과 신도들의 가벼운 발걸음과 해송림도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