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路 떠나다] 수선화길을 찾아서

[길 路 떠나다] 수선화길을 찾아서
'말(몰)마농꽃' 향기에 취하는 겨울제주의 서쪽 풍경
  • 입력 : 2016. 01.15(금) 00:00
  •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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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서쪽 대정읍과 안덕면 지역 곳곳에 겨울꽃 수선화가 꽃을 피워내고 있다.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는 수선화를 제주도를 대표하는 1월의 꽃으로 선정했다.

대정읍·안덕면 일주서로 군락 이뤄
돌무더기 속에서도 질긴 생명력 발휘

한림공원·한라수목원도 관상용 재배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가 제주도를 대표하는 1월의 꽃으로 수선화를 선정했다. 추사 김정희의 글을 보면 수선화는 한반도에서는 귀한 꽃이었지만 제주섬에서는 천대를 받는 잡초였다. 이 잡초가 지금 겨울 제주의 풍경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수선화를 찾아 제주의 서쪽을 향했다.

도로가 새로 개설되거나 넓혀지고, 들판에 건물이 우후죽순 들어서는 만큼 수선화의 생태계도 많이 파괴됐다. 하지만 이 계절 서귀포시 대정읍과 안덕면에서는 어디를 가더라도 수선화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대정읍 시가지를 벗어나서 서귀포시 방향으로 추사교차로를 거쳐 안성교차로까지의 1132번 도로(일주서로)를 수선화길로 꼽을 만하다. 도로 양쪽에 길게 늘어선 수선화 군락은 겨울에도 푸른 제주의 풍광과 더할 나위 없이 어우러진다. 천지가 잎을 떨구어 잿빛으로 변하는 한반도와 다른 제주의 겨울은 수선화가 있어 더욱 푸르다.

한림공원 제주수선화.

안성교차로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선 뒤 약 2㎞만 차로 달리면 대정향교에 도착할 수 있다. 대정향교 주변에서도 수선화군락을 쉽게 감상할 수 있다. 단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향교 돌담에 피어난 수선화는 유백색 꽃잎으로 그 자태를 뽐낸다. 이 지역에서는 돌담 밑에서 솟아나거나 돌무더기를 뚫고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수선화를 볼 수 있다. 수선화의 생명력은 제주사람들이 이 고을 사람들을 '대정 몽생이'라고 부르는 연유를 짐작케 해준다.

대정향교에서 안덕면 사계리까지는 향교로를 이용해 남쪽으로 향한 뒤 사계북로를 거쳐 산방로를 따라가면 사계마을 안길에 진입할 수 있다. 사계리에도 마을 곳곳에 수선화가 있다. 구멍가게 앞 소나무 가로수 밑에서 꽃을 피운 수선화 한 무더기도 야생 수선화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사계리에서 화순금모래해변까지 산방로에도 수선화는 흔하다.

대정읍 일주서로 돌담 수선화.

거대한 산방산을 끼고 있는 산방로에서 보는 수선화는 특히 남다르다. 벌거벗은 채 모진 바람을 견디어낸 팽나무의 모습은 많은 제주의 작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켜왔다. 그리고 많은 육지 작가들을 제주로 불러들였다. 이곳의 수선화는 팽나무의 그 모습과 다르지 않다. 여러 해 해풍을 맞아 뒤틀린 꽃줄기와 바다를 외면한 꽃잎은 팽나무의 그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중 만개한 수선화를 보고 제 아무리 고고해도 뜰 밖에 나서지 못하는 매화보다 낫다고 시를 지었다. 수선화의 가치를 몰라보는 제주사람들을 '무식쟁이'라 놀리고, 수선화(水仙花)를 만난 감흥을 신선과 인연을 맺은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스신화 속 나르시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뻑(자아도취)' 수준이다. 소년이었던 나르시스가 '자뻑'에 빠져 죽음에 이르고, 노년이었던 추사가 '자뻑'을 극복해 예술의 경지를 높였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대정읍 일주서로 돌담 수선화.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는 수선화를 1월의 꽃으로 선정하면서 몇 가지 설명을 붙였다. 여러해살이 구근식물이고,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라는 설명이 있었다.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꽃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제주도에서는 겨울철 눈 속에서 피어난 수선화를 볼 수 있다는 점도 남다르다. 연구소가 설명을 빠트린 수선화의 제주도식 이름이 재밌다. 제주사람들은 수선화를 '말마농꽃'이라 불렀다. '마농(마늘)'과 모양새가 비슷하고 흔한데다 알뿌리까지 커서 '馬'를 뜻하는 접두어 '말'을 '마농' 앞에 붙이고 '꽃'을 뒤에 더한 이름인 듯하다.

수선화를 다량 심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곳도 있다. 지금 한림공원에는 금잔옥대 수선화 50만 송이가 피어 짙은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도심과 가까운 한라수목원에도 수선화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사실 중산간마을 올레에서도 흔히 볼 수 있고, 제주시 도심 골목안길 집담 밑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어디에서나 수선화의 향기에 취할 수 있는 제주도의 겨울이다. 표성준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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