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소설가 '나' 통해
자전적 노동 경험 녹여내
열악한 한국노동현실 고발
그의 문장은 가슴에 와서 콕 박힌다. 그리곤 이내 먹먹해진다. '자본의 세상에 태어나 자본이 가르쳐준 것만 보다가 죽는구나!' 첫 페이지를 넘긴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들어온 주인공 '나'(박해운)가 툭 내뱉은 이 한 문장 위로 여러 얼굴이 겹친다.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입각해 굴러가는 이 사회 속 소위 을(乙)이라 불리는 이들의 얼굴이다. '비정규직''하청업체''외국인 노동자' 각자 조금씩 다른 명찰을 달고 있지만 비슷한 표정의 그 얼굴들 말이다.
소설가 이인휘는 그간 노동문학에 매달려왔다. 오랫동안 노동문화운동을 했고 박영진 열사 추모사업회에서도 일한 바 있다. 2016년 소설집 '폐허를 보다'로 오늘날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억압적 정치현실을 핍진하게 그렸다는 극찬을 받으며 만해문학상에 선정된 그가 12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건너간다'를 펴냈다.
소설 속 '나'는 소설가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식품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실제로 작가는 아픈 아내를 간병하며 시골 공장을 다녔다. 그는 당시를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 순간’이라 회상한다. 사실 소설 속 '나'에는 작가의 삶이 어느 정도 겹쳐있다. '나'의 "폐허를 넘어서 희망을 건져올리듯 소설을 쓰면서 내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다"는 독백이 아마 작가가 다시 펜을 잡았던 그 순간의 독백은 아니었을지.
소설 속 '나'가 다니는 공장은 수많은 비리를 배경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CCTV를 설치해 매시간 노동자를 감시하고 휴식시간을 줄여 생산량을 늘리라고 노동자를 압박한다. 그런 와중에 불평등한 급여 문제가 불거지고 일흔살을 앞둔 동료 '왕언니'가 1인시위를 시작하지만 동료들은 그저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다. 이런 공장의 모습은 며칠 전 신문에서 읽었다고 말한대도 놀랍지 않을 만큼 아직 갈 길이 먼 오늘날의 한국노동현실과 닮아있다.
어느 날 소설 속 '나'는 이전에 근무하던 공장에서의 일들을 풀어낸 소설을 '왕언니'에게 보여준다. 한 노동자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담긴 소설을 읽은 '왕언니'는 눈물까지 보이며 고맙게 읽었다고 '나'에게 말한다. '나'는 그 '왕언니'의 눈물이 죽은 ‘노동자와 '왕언니' 자신의 삶이 어딘가 맞닿은 느낌이 들어 상처가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왕언니'의 눈물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소설 속 이야기와 인물들에 오늘날 우리네 삶과 상처들이 맞닿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창비.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