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삶과 죽음 오가는 격렬한 공간, 바다

[책세상]삶과 죽음 오가는 격렬한 공간, 바다
제주 소재 르 클레지오 소설집 '폭풍우'
  • 입력 : 2017. 11.03(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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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의 해녀들에게 헌사
섬 찾은 종군기자 주인공
치유하고 회생하는 여정

"차가운 물속에서 투명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세계,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모든 소리가 다 각각인 세계, 교활하거나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세계, 단지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웅성거림이 있는 세계."

그가 우도 바다에서 마주한 풍경이 이랬을까. 세계에서 몇 남지 않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으로 제주를 칭했던 르 클레지오. 그는 2007년 처음으로 고향 모리셔스와 닮은 제주땅을 밟았고 이듬해엔 명예제주도민이 되었다. 제주 방문 기간에 4·3, 해녀, 돌하르방 등을 직접 취재했던 그의 소설에 언젠가 제주가 담기리라 예상했고 마침내 한국어판으로 그 소설이 도착했다. '제주 우도의 해녀들에게'란 문구가 첫 장에 박힌 소설집 '폭풍우'다.

작가는 여덟살 때 아버지가 구독하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통해 해녀의 존재를 알았다. 소년은 특별한 장치도 없이 숨을 참으며 깊은 바다로 자맥질해 전복 따위를 캐내는 젊은 여인들에게 매혹됐다. 어느덧 장년이 된 작가는 제주에서 해녀들을 직접 만났고 그 기억이 '폭풍우'에 녹아있다.

작품집의 절반을 채우는 동명의 소설 '폭풍우'엔 제주 바다와 파도, 해녀들의 갯내음이 밀려든다. 소설은 베트남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필립 키요가 우도를 다시 찾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30년 전, 이 섬에 머물다 아무말 없이 떠나버린 여인 메리 송 때문이다. 사랑했던 그 여자처럼 홀연히 바다로 사라지길 원하는 키요에게 어느 날 해녀 엄마를 둔 열세살 혼혈소녀 준이 말을 걸어온다.

소설은 이들의 사연을 오가며 삶과 죽음이 격렬하게 만나는 순간을 그려낸다. 바다에 목숨을 내어놓고 사는 해녀들의 운명인 양 파도 위로 몰아치는 폭풍우는 모든 것을 삼키고 때로는 정화시킨다. 군인들의 집단 성폭행 장면을 지켜보기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키요는 폭풍우가 지난 일을 영원히 지워버리길 바란다. 준은 폭풍우 일던 바다에서 죽음의 의식을 치른 뒤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우도 여객선이 토해내는 인파들을 편치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관광객들에게 시달리는 이 바위섬'이란 표현처럼 더 이상 '소박한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하는 우도의 현실이 자리한다.

소설집 후반부에 실린 '신원 불명의 여인'은 아프리카 가나와 프랑스를 오가며 성폭력으로 태어난 아이들의 지난한 삶을 담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전쟁터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문명의 도시 파리에서도 버젓이 일어난다.

두 편의 소설은 꽤 달라 보이지만 전쟁과 폭력,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가 관통하고 있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거센 바닷물결만 내리치는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지는 이유다. 송기정 옮김. 서울셀렉션.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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